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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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의 주역은 소련이었다. 미국과 영국 등, 집단서방은 조연에 불과했다. 소련은 나치 독일에 무려 2,700만의 희생자를 내는 처절함 끝에 승리를 쟁취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소련의 승리에 끈질기게 따라 붙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소련이 미국에게 랜드리스(Lend-Lease)를 제공받았기 때문에 소련이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미국이 소련에 제시한 랜드리스의 허와 실에 대해 언급해보고자 한다.

Map shows US Lend Lease shipments to USSR in WW2 by route, 출처 : "Lend-Lease Act (1941)," in Milestone Documents, National Archives of the United States, Washington, D.C.
랜드리스(Lend-Lease)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주장한 미국의 대연합국 물자지원 계획을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 이탈리아, 일본 제국에 대항하여 이들과 대립 중인 연합국을 위해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지원하자는 취지로 기획되었고, 1941년 3월 11일부터 시작해 1945년 9월 2일에 종료했다. 그 이후에도 전쟁 당시 보내기 약속했던 물자들은 지속적으로 운송을 계속하여 1945년 9월 20일에 원조를 완전히 종결했다. 항복한 적성국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 주둔하는 부대를 위해 각종 군용 장비 및 복구 장비, 중간에 중단할 경우 소요되는 행정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간 경우 등을 고려했다. 그런데 이 랜드리스가 대영제국이 완전히 쇠락한 이후, 무주공산이던 세계 패권이 미국에게 쏠리는 신의 한 수를 가져왔다. 국제적인 군사 및 정치의 주도권 역시 기존 대영제국에서 미국으로 이양된 셈이었다. 이는 세계 양차 대전을 겪으며 초토화 된 유럽에서 전쟁 피해가 거의 없었던 미국으로 그 패권이 이양되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당시 연합군의 주력이었던 유럽 국가들의 상태는 완전 초토화 되었고, 나치 독일에게 모든 패권이 넘어갈 위기에 있었다. 한창 독일의 대항마였던 소련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혁명과 내전으로 인해 국정이 붕괴된 상태였고, 스탈린이 경제개발 5년 정책을 펼치며 농업 중심의 경제를 공업으로 바꾸고 있던 찰나, 나치 독일의 갑작스러운 침공을 받으면서 전쟁 수행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영국 또한 제1차 세계대전 때 엄청난 전비가 낭비되었고 그로 인해 경제 또한 엉망이었다. 게다가 그동안 수탈하고 있던 해외 식민지들에 대한 통치도 어느 정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에서 치료가 덜 된 상태였었기에 제2차 세계대전은 영국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치명적이었다. 비록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었지만 이 양차 대전으로 인해 영국은 다시 19세기 때와 같이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위상을 회복하지 못했고, 사실상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본군에 대항하던 중화민국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상태였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0년에 주창했던 민주주의의 병기창(Arsenal of Democracy) 정책을 펼치면서 각종 무기나 군수품 외에도 식량이나 연료를 지원했다. 특히 소련 입장에서는 미국의 원조와 무역 모두 전후 소련 경제에 있어 어느 정도 기여했지만 비중이 큰 측면은 미국의 원조였던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무역에 있어서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무역 수지에서 소련의 전체 적자는 40억 루블에 달했으며 당시 공식 환율로는 7억 6,500만 달러를 상당했다. 이는 전쟁 전, 소련 연간 무역 수입 규모의 2년 치에 달하는 규모였다. 물론 1930년대 후반까지 소련 경제는 사실상 자급자족이었으며 무역 비중은 1937년 국민 총소득의 1% 이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의미 없는 수치이기도 했다.
소련의 입장에서 1941~42년에 무역은 매우 중요했다. 군수품을 수송하는 첫 번째 협정은 소련의 원자재인 자원과 교환하는 물물교환 방식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역 적자는 미국과 영국의 상호원조에 의해 소련으로 무상 제공되는 거대한 물자를 수입한 규모에 비하면 그다지 보잘 것 없었다. 미국의 대(對) 소련 랜드리스만 해도 106억 7,000만 달러에 달했으며 추가로 영국이 3억 1,200만 파운드를 제공하여 도합 120억 달러에 달했다. 이와 같은 소련에 대한 랜드리스 수송의 대부분은 1943년 하반기에서부터 1944년까지 전달되었다. 물자 유입이 제한적이었던 첫 번째 단계에서는 무기가 주류를 차지했다. 그러나 1943년부터 달러 가치로 볼 때 랜드리스 품목의 가장 큰 부분은 산업 설비, 수송, 통신 및 농기구, 금속, 금속제품, 화학, 연료 및 식량과 같은 민수용으로 전환할 수 있는 생산품들로 주로 구성되었다. 연합국의 전체 자원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엄청 크게 볼 수 있는 소련 원조라는 것은 다른 연합국 국가와 비교해서 세밀하게 뜯어보면 그리 크지 않다. 이런 소련 원조는 소련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분명히 지적하는 것과 같이 영국과 미국이 다른 연합국 국가들에게 제공한 경제 원조의 전체 규모 1/4도 채 되지 않았다. 1942년 중반부터 1943년 중반까지 약 2,950억 달러에 달했던 영국과 미국의 전시 총 지출에 비하면 여전히 소규모였고 미국과 영국의 소련 원조는 기껏해야 4% 정도에 불과했다.
특히 미국이 영국에 지원해준 것으로 물품들과 지원량을 환산해 보자면 아주 턱없이 지원한 것으로 그 정도 지원을 가지고 나치 독일 격퇴에 기여했으며, 미국과 영국의 랜드리스가 없었다면 소련은 붕괴되었을거라는 집단서방과 미국을 편드는 자들의 얘기는 얼마 주지도 않아 놓고 생색을 내고 있는 격이다. 마치 몇일을 굶주려 있는 자에게 고작 빵 반쪽을 내놓고 도와주었다며 생색을 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같은 서구의 소련 원조는 폭넓은 의미에서 무기, 기계, 차량, 선박, 통신수단, 자재, 연료 등의 장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일부 장비는 군용이었으며 일부는 민수용이었고 대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군용을 목적으로 만든 가공 식품이었다. 이같은 원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노동 방식과 경제 관념을 알아야 한다. 소련의 노동 방식은 군인과 산업 노동자, 농부로 구분해서 고려해야 한다. 이들 모두 장비를 수요받은 자들이지만 이들 중, 오직 산업 노동자들만이 장비를 생산할 수 있었다. 또한 모두 음식을 소비한 사람들이지만 공산주의 경제론으로 볼 때 직업적으로 농부들만이 식량을 생산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소련 경제는 이론적으로 어떤 종류의 식용품, 각종 산업 장비 같은 것들을 생산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노동자들이 조직되어질 수 있지만 경제개발 5년을 시행한지 겨우 10년 차 정도 밖에 안 되는 소련 산업 노동자들의 숙련도는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기술력도 마찬가지였고 경영상 적자를 감안했을 때 첨단 기술 공정과 고급 제품을 위한 혁신은 명백히 비싸게 먹혔을 것이기에 이는 단기적으로는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인 원조에 있어서 서방의 군사 장비는 전쟁의 모든 단계에서 자원을 투입할 수 있는 소련의 역량을 증대시키기는 했다. 이는 군사 장비 증대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었으며 미국의 수입 장비들은 소련 국내에서 생산된 저급한 수준의 낙후된 장비들보다는 좀 낫기는 했지만 지원량도 얼마 되지 않고 더불어 서방에서 수입된 군수품이 소련 병사들 사이에서 썩 좋지 않은 평판을 받았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평판은 서방의 무기가 소련과 독일이 대치한 동부 전선의 상황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제 전차는 기후와 지형, 독일군의 공격에 비해 견고하지 못해 독일 전차의 포격 한 방에 작살나기 일쑤였고, 속도도 느린데다 평지로 구성된 소련의 지형에서 제대로 된 활용은 힘들었다. 게다가 소련의 혹독한 겨울은 전차 내부에서 방한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전차병들은 추위에 시달렸고, 엔진 오일까지도 얼어 붙는 등, 활용도의 폭이 매우 좁았다. 영국과 미국제 항공기는 갑작스러운 침공으로 인해 훈련이 불충분한 소련의 젊은 조종사들에게는 지나치게 복잡한 면이 있었다.
우선 러시아어나 키릴문자로 써있는 기기 사용법이 아닌 영문으로 써있는 기기 사용법은 단 시간 안에 이를 운용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마치 <이솝우화>에서 두루미를 초대한 여우가 두루미의 긴 부리로 먹지 못하는 접시가 담긴 가져와 대접한 꼴이었다. 이것이 대조국 전쟁이라 불리는 소련-독일 전쟁에서 미제와 영국제 전투기들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였다. 그러한 무기들은 소련군 전투력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고, 소련제 무기를 대체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서방 무기들은 소련군의 전투력 향상에 거의 도움되지 못했다. 다만 도움이 된 군용 자산은 있었다. 그동안 소련의 장비 이송은 말에 의존했고, 국내 장비와 인력은 느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철도 수송을 하기 위해, 말과 수레에 장비들을 싣고 철도 도착지로 이동해야 했다. 도착지 역에서 전선까지 기차로 보급품을 실어 보내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보급지에서 기차역까지 이송 문제는 매우 느렸다. 그런데 미제 수입 트럭와 지프, 야전 통신 시스템, 휴대용 라디오 등이 보급되어 소련군 장비를 보완함으로써 이송이 빨라졌다. 이는 소련군 전투력의 질을 향상시키고 양적으로도 속도면에서 빠르게 제공될 수 있었기에 이는 큰 도움이 되었다. 만약 미제 고성능 차량에 소련의 자원 고급 연료인 석유, 더불어 효과적으로 운용하는데 필요한 연료 첨가제가 없었거나 차량화 보병 부대를 조율할 수 있는 통신 시스템이 없었다면 소련군의 역량은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랜드리스 운영에 있어 큰 제약 조건은 자원을 장비 제조에서 장비 사용에 쓸 수 있게 얼마나 빠르게 전환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었다. 전체적으로 공산주의 시스템 때문에 노동력이 제한되어 빠르게 변환이 힘들었다. 랜드리스 무기들이나 장비들을 감독하는 서방의 감독자들은 소련의 서방 장비 취급자들이 때때로 부두 한쪽에 장비를 태만하게 방치하는 행태에 대해 크게 짜증을 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소련이 서방의 랜드리스에 대해 배은망덕하게 굴었거나 그저 부주의한 무관심이 아니라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 키릴문자와 러시아어에 익숙한 군인들이 단시간에 영문 문자와 영어를 습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력 배분 또한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예를 들어 공장에 장비를 설치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있지 않거나 설치한다 하더라도 배치되어 일을 할 수 있는 노동자가 없다면 수입되어진 기계는 녹슬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소련은 랜드리스 달러보다 당장 전쟁에 사용할 자원이 더 필요했고 전쟁 중에 낮선 환경에서는 이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소련에게 준 랜드리스 중, 가장 도움이 되었던 부분은 통조림을 비롯한 농축 형태의 수입 가공 식품이었다. 이는 군용 보급으로 곧바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같은 군용 식량 보급의 증가는 소련 국내에서 생산되는 식량을 민수용으로 쓸 수 있게 도움을 준 셈이었다.
군인이 아닌 일반 국민들에게 줄 식량 공급의 최소 기준이 달성되자 농부들은 군복무도 하면서 산업과 군대를 위한 장비 제조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1943~1944년까지 소련에서 농업은 생산성이 매우 낮았다. 농장에서 공장으로 노동자들이 대거 이전했기에 농사짓는 사람이 부족해졌고 이는 전체적인 생산량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에 랜드리스로 된 식량이 들어오니 본래 농부였던 공장 노동자들이 농장으로 돌아가고, 공장 노동자들은 장비 생산에 박차를 가하니 소련의 전시 경제는 어느 정도 틀을 갖추었던 것이다. 이처럼 소련에게 준 랜드리스는 식용과 같은 부분과 약간의 필요한 군수품 정도를 제외하면 실용도는 크게 낮았고, 어느 정도 기여한 것 또한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소련이 판을 뒤집을 수있었던 것은 넓은 국토를 최대한으로 활용한 전략과 장기전에 돌입했을 때 버틸 수 있는 자원들, 그리고 반드시 소련을 지켜야한다는 군인들의 저항과 국민들의 인내심,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의지였다. 소련은 만약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내주더라도, 예카테린부르크나 우랄산맥 건너 중앙아시아의 노보시비르스크, 바이칼 근처의 이르쿠츠크까지 계속 거점을 옮겨가며 저항하는 것이 가능했고, 국토와 자원, 인구적인 측면에서 턱없이 부족한 독일은 추격에 한계가 있었던데다, 장기적으로 오래 버티는게 불가능했다. 게다가 주력이 우랄산맥을 넘는다면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시간도 워낙 많이 걸리기에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국 영토라는 이점을 활용해 독일이 장악한 영토를 향해 언제든지 반격이 가능했고, 전선 또한 넓어지면서 여기 저기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발칸 지역과 서부 전선의 영국이 언제 반격해 올지도 알 수 없었던 노릇이었으며 독일군도 만만치 않은 인원이 희생되고 있기에 정예군을 오늘은 동부전선을 갔다가 내일은 서부전선으로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독일 입장에서 소련과의 장기전은 매우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즉, 랜드리스가 없었다 할지라도 소련은 승리가 가능했다는 얘기지만 2,700만이라는 인원보다 더 많은 희생자들이 나왔을 것이고, 소련군이 완벽하게 회복할 때까지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이다. 그나마 랜드리스가 있었기에 승리를 앞당길 수 있었던 것 뿐이고, 소련이 있는 동부전선에 대부분의 정예군들이 투입되었기 때문에 노르망디 상륙작전 또한 가능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랜드리스가 쓸모없었다는 것이 아니지만 랜드리스와 양과 질은 전황을 뒤집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고, 랜드리스가 없었다 해도 다만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소련은 장기전에 특화된 특성을 이용해 어떻게든 승리했을 것이다. 그러니 랜드리스로 인해 소련이 판을 바꾸어 승리했다는 논리는 그저 낭설에 불과하다. 히틀러는 스탈린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것이 신의 한 수 였고, 당시에는 훌륭한 전략이었지만 불가침조약을 먼저 깬 것이 패착이었고, 결국 나치의 파멸을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