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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상징, 달라이 라마의 생성과 현재, 그리고 추잡한 파일에 등장한 두 얼굴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4 21:18:27

몽골 제국은 티베트를 정복하면서 성과 같은 행정구역을 설치하지 않고 다루가치들을 파견하였다. <티베트 정치사(Tibet: A Political History)>를 저술한 샤캅파(Shakippa)는 다루가치가 라싸에 있었지만 티베트 내정에 전혀 간섭하지 않았고, 원나라 황실로부터 책봉이 있었지만 이는 사카 판디타(Saka Pandita)와 관련 없는 일부 샤캬파 수령에게 해당할 뿐이라 적시했다. 원나라는 티베트 불교 샤캬파(홍모파)의 샤캬틴진을 대리 통치인으로 삼았다. 칭기즈칸은 위구르 문자를 개량한 몽골 문자를 만들라고 지시했는데, 쿠빌라이 칸은 여기에 더해 티베트 불교 승려 팍빠를 시켜 파스파 문자를 만들도록 했다. 홍모파의 승려 팍빠는 상도를 중심으로 샤머니즘, 경교, 이슬람 등 온갖 종교가 각축을 벌이던 몽골에 티베트 불교를 전파하였다. 비록 파스파 문자는 원나라에서만 사용되었고 여타 몽골 제국 방계 국가들에서 사용되지 못하면서 사장되었지만, 티베트 문화가 원나라에 몽골인 지배층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음은 부정할 수 없다. 파스파 문자는 티베트 대장경을 몽골어로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 티베트인들은 색목인으로 분류되어 원나라에서 우대를 받았다. 

Tibetan spiritual leader the Dalai Lama presides over an event celebrating his 90th birthday in Dharamshala, India. 출처 : Ashwini Bhatia / AP


팍빠와 같은 티베트 불교 수장들이 원나라 황실로부터 받은 대우는 왕공귀족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티베트 불교 수장들은 명목상 황제의 스승으로 대우받았기 때문에, 이들의 행렬에는 황제 및 후비공주 등 모두가 문 밖에서 영접할 정도였다. 원나라 무종(武宗) 시대에는 티베트인 승려(西僧)를 구타하는 자는 그 손을 자르고 욕하는 자는 혀를 절단한다는 황명이 내려졌다. 절대 권력을 얻은 티베트 불교 승려들은 한족들의 논밭을 강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등의 많은 횡포를 부렸다. 다른 한편 중화주의자들의 반 티베트 감정은 중국 내 반 몽골 감정과 함께 엮여있다. 다시 말해 한족 자신들은 제국주의, 식민주의 가해자가 아니며 과거 원나라, 청나라 때의 복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은연 중에 생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티베트 불교에 샤캬파만 있던 것은 아니고, 샤캬파와 경쟁하던 캬규파에서 차가타이 칸국의 도움을 받아 봉기를 일으킨 적도 있었다. 봉기는 진압되었지만, 원나라가 붕괴되자마자 티베트에서는 캬규파 세력이 샤캬파를 밀어내고 티베트를 장악했다. 그러나 원나라, 명나라 교체 시대 몽골족들이 명나라에게 패퇴하는 과정에서, 대도가 함락당하고 상도가 명나라 군에게 파괴된 것을 계기로 티베트 불교 역시 쇠퇴하게 되었다.


원나라의 티베트 불교 행사는 엄청나게 화려하고 과시적이었는데, 더군다가 티베트 본토의 샤캬파 세력이 위축되는 상황에서, 북원에서 원나라 때 티베트 불교 행사를 재현하기는 불가능했다. 티베트 불교는 투메드 부락의 알탄 칸 때부터 다시 몽골인들의 종교가 되었다. 쿠빌라이 칸이 샤카파를 지원한 것과 대조적으로 알탄 칸은 부족민 전체를 이끌고 티베트 불교 겔룩파로 개종하였다. 이어 달라이 라마라는 명칭도 몽골의 알탄 칸이 지어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578년에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교주 소남갸쵸가 알탄 칸을 방문했는데, 알탄 칸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 티베트 불교 겔룩파를 국교로 선포했으며 교주를 달라이 라마로 선포했다. 이는 몽골 지역의 종교가 티베트 불교가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최초의 달라이 라마 등장이었다. 소남갸초는 자신의 선대 교주들을 각각 1, 2대 달라이 라마로 칭하고 알탄 칸에 감사하는 마음 및 알탄 칸 계의 정통성 확보, 몽골을 통한 티베트 내에서의 겔룩파 세력 강화를 위해 알탄 칸의 증손자를 4대 달라이 라마로 삼았다. 따라서 티베트의 4대 달라이 라마는 유일한 몽골인 출신의 달라이 라마이다. 알탄 칸이 부족민 전체를 이끌고 티베트 불교로 개종한 것은 투메드 부락과 적대하던 다른 부족들 사이에서도 영향을 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 오이라트 연맹 역시 티베트 불교로 개종하였다. 유목제국은 정주민 제국과 다르게 체계적인 왕위 계승법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가 거점이 요새와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내분으로 인한 국력이 약화되는 것이 큰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티베트 불교나 이슬람교는 유목 제국들의 내분을 막는 해결사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일 티베트는 영국 및 러시아 제국의 간섭을 받고, 짧은 시기 동안 영국의 보호령이 되면서 동시에 청나라로부터 벗어나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해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티베트는 자연스럽게 청나라와 중화민국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중화민국 시기에 티베트는 실질적으로 독립했으나 중국은 티베트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티베트를 중국의 고유 영역으로 간주했다. 또한 티베트는 세계열강들에게 미승인국으로 취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북 지역인 만주에 중심을 둔 중화인민공화국이 제2차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중화민국을 대만 섬으로 밀어냈다. 그 이후 6.25 전쟁 도중이었던 1951년 중공군이 티베트를 침공하여 병합했다. 한 때 티베트인은 위구르인과 마찬가지로 중국 내에서 가장 독립 열망이 높은 민족이었다. 티베트는 중세 토번 제국을 기점으로 독자적인 티베트 문화를 확립하였으며, 중국 명나라 때는 형식적인 조공 관계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다시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 체제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청나라 때는 만주족들의 우대로 한족보다 더 높은 권리를 인정받으며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누렸다. 동아시아 지역은 서구보다 민족주의가 먼저 확립되고 발전한 지역으로써 티베트인들 역시 전 근대부터 자신들이 티베트인이라는 고유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티베트는 중국 지배의 영향으로 동아시아로 여겨지고 있을 뿐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남아시아에 가깝기 때문에 한족과 동화되기 어려운 실정이었지만 이제는 차츰 동화되어 가고 있다. 1987년에는 달라이 라마의 ‘평화 5조안’ 제안과 관련하여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고, 1989년에는 14대 달라이 라마인 텐진 가초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이후 유혈사태까지 발생했지만 점차 그 독립의 열기는 식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최근 텐진 가초의 활동이 논란이 되고 있다. 첫 번째가 1980년대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했다는 점이다. 평소 평화를 강조하며 폭력을 혐오하며 오로지 비폭력으로 나섰던 그이기에 태평양 전쟁 전범들의 위패를 안치한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했다는 것은 평소 비폭력적이고 평화를 사랑한다던 그와 모순되는 행위다. 그는 이같은 방문이 논란이 되자 이후 2018년까지 총 25차례 방일하는 동안 야스쿠니 신사를 다시 찾지 않았다. 


더불어 그는 1993년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전쟁은 사상자를 최소화한다면 용납할 수 있다(War may be acceptable if it minimizes casualties)."라고 말하며 모두를 경악시켰다. 아울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사진을 보는 것을 좋아하며 나치 독일군의 무기에도 관심이 많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평화보다는 사람을 죽인 전쟁 무기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2001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에 대해서 "놀랍고 감탄스럽습니다. 이번에는 세계 대전 두 차례,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미국이 목표물을 신중하게 선정하고 민간인 사상자를 최소화했습니다. 이것은 더 나은 문명의 신호입니다(It's amazing and admirable. This time, unlike the two World Wars, the Korean War, or the Vietnam War, the United States was very careful to target its targets and minimize civilian casualties. This is a sign of a better civilization)."라고 했다. 평화를 사랑한다는 가면을 쓰고, 누구보다 더 전쟁광이었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국 측이 축소한 기록이지만 최소 50만이 죽었고 500만이 넘는 이재민을 남겼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는 미국 측의 일방적인 기록이라는 것이고,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자체적인 사망 피해자 조사는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그러나 50만은 훨씬 넘는 것이 모든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그는 미국 공식 추정 50만 명의 목숨 따위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평화와 전쟁론에서도 달라이 라마는 철저히 이중론자였고, 불교 교리보다 과학을 더 사랑하였고 평화보다 전쟁 무기를 더 사랑하였으며 전쟁으로 고통받는 서민들보다 미군의 정밀 타격을 더 감탄한 위선자였다.


달라이 라마의 부적절한 행동을 보면 최근 나타나는 엡스타인 파일의 내용에서 그가 등장한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미국 법무부가 새로 공개한 엡스타인의 이메일에서 달라이 라마의 이름이 169차례 언급되었다. 본인은 이것이 루머일 뿐이라 일축했지만 그간 그가 행한 위선적인 행위들, 그리고 출처나 근거 없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한 것처럼 포장하는 기행들, 여러 부분들을 본다면 달라이 라마의 비도덕적인 행위들은 반드시 지탄 받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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