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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이란 지역의 이단아 쿠르드족 이야기 - 3편 : 이란 카자르 왕조 체제의 페르시아 담배 시위(Persian Tobacco Protest)의 주역이 된 쿠르드족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4 21:19:17

당시 전 세계를 두고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영국과 러시아 제국은 페르시아에서 가장 활발하게 외교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며 러시아와 영국 모두 페르시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당시 개혁적인 성향을 갖고 있던 아제리족 출신의 아미르 카비르(Amir Kabir) 재상이 집권하고 있었을 시기에는 이같이 러시아와 영국의 침탈은 노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카비르는 영국이나 러시아 모두 신뢰하지 않았으며 둘 사이에서 중립외교로 실리를 추구했다. 카비르는 러시아와 영국의 영향력을 최대한 억제하려 노력을 기울였으며 러시아 상인들이 아스트라바드(Astrabad) 지역에서 병원과 무역사무소를 운영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카스피해 남동쪽의 아슈라데(Ashurade) 섬을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던 러시아인들을 추방했다. 이는 영국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페르시아만을 통과하는 이란 선박에 대해 영국이 무조건 나포하여 취조하는 행위 등을 규탄하며 이를 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카비르는 미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이란과 큰 접점이 없었던 국가들과 우호 관계를 수립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카비르에 대해 앙심을 품던 영국과 러시아는 서로 일시적인 동맹을 맺고 공동의 적인 카비르를 몰아내면서 이란의 외교는 영국이냐, 러시아냐를 선택하는 길만이 남았다. 

People coming together for the tobacco protests,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나스레딘 샤는 집권 초기인 1856년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를 공격해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파트 알리 샤(Fath-Ali Shah Qajar, 1772~1834) 시절에 러시아에게 함락당한 카프카스 지방을 탈환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헤라트를 점령하여 이란의 영토를 확장하고 이를 계기로 중국 청나라와 연결하여 영국-러시아와 대항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영국은 이를 빠르게 파악하고 이란의 헤라트 점령에 대해 크게 반발했다. 이는 이미 카자르 왕조가 반 정도 친(親) 러시아 세력이라 보고 있었으며 영국이 페르시아의 헤라트 공격은 중국 청나라와의 연결 뿐만 아니라 영국령 인도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영국은 카자르 왕조에게 헤라트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지만 나스레딘 샤는 이를 듣지 않았다. 그러자 영국은 이란에게 선전포고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이로써 '앵글로-페르시아 전쟁(Anglo-Persian Wars)'이 발발한다. 영국은 페르시아만을 공격하면서 강을 따라 이란의 도시들을 연달아 함락시키며 테헤란으로 북상했다. 영국에게 연이어 패배하고 빠르게 북상하자 나스레딘 샤는 영국에게 무릎 꿇고 강화 협상을 시작했다. 더불어 러시아 제국에게도 사절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만 러시아 또한 이란의 헤라트 점령을 좋게 보지 않고 있었으며 러시아 제국은 나스레딘 샤에게 헤라트에서 철수를 요구했다. 러시아가 나스레딘 샤의 헤라트 점령을 좋지 않게 보았던 이유는 러시아가 장악한 중앙아시아와 동투르키스탄 일대의 영토를 넘보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도움도 얻지 못한 나스레딘 샤는 1857년 3월 4일에 마침내 파리에서 불평등 조약을 맺으며 굴욕을 당해야 했다. 카자르의 군대는 파리 조약으로 인해 헤라트에서 철군해야만 했고, 아프가니스탄 왕국을 인정하며 이 지역의 완충을 허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이란의 대(對)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영향력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이후 나스레딘 샤와 이란은 영국과 러시아에 의해 그 이권이 대부분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카자르 왕조는 러시아와 영국의 거대한 세력 다툼의 장인 그레이트 게임의 가장 대표적인 희생 국가들 중 하나였다. 러시아는 1828년에 체결된 투르크만차이 조약 이후, 조금씩 이란의 영토를 점령해갔다. 카자르 왕조가 거의 멸망할 수준까지 쇠퇴하게 되니 러시아는 그때서야 전략을 바꾸어 이란을 지원해주는 척 하며 이란의 왕실과 귀족들을 친러주의자로 만들어 그들을 조종해 각종 이득을 획득하는 수법을 쓰기 시작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영국령 인도 사이의 좋은 전략적 위치는 러시아의 눈독을 들이기에 충분했고 또한 많은 석유 매장량으로 관심이 많았다. 특히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 남부 지역과 카스피해로 연결된 타바리스탄을 욕심내고 있었는데 이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이 쿠르드족으로 쿠르드족을 대대적으로 선동해 이란인들을 폭력적으로 제압하고 지역 석유 채굴권을 카자르 조정의 허가 없이 강탈해 석유를 뽑아 먹었다. 


러시아는 이와 같은 내전 야기 및 조정의 친러 세력들을 이용하는 방법 등으로 거의 1세기 가까이 이란의 내정을 장악하며 이란 땅에 빨대를 꽂고 갖은 이익을 빨아 먹을 수 있었다. 이는 이란이 현재까지도 러시아를 증오하는 이유가 되었다. 영국 또한 이란에게 큰 해악이 되었다. 러시아의 남하를 매우 신경질적으로 경계하던 영국은 이란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는데, 이란 궁정은 결국 러시아와 영국의 은행가들의 압박과 협박에 이권을 내줘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1879년에는 러시아 군 장교들이 이란 궁정에 무장을 하고 진입하여 이란 왕실의 궁녀들을 겁탈하고 환관들을 대놓고 살해했다. 1890년대에는 아예 러시아인들은 대놓고 궁에서 설치고 다니며 이란의 왕족과 귀족들을 마음대로 유린했다. 영국인들도 이란의 주권을 대놓고 무시한 채, 활보하고 다녔다. 영국과 러시아는 19세기 내내 경쟁적으로 페르시아에 전신, 철도 등을 깔아주면서 각종 이권 침탈을 가속화했다. 이와 같이 외세의 간섭이 심해지니 이란 시민들은 분노가 점차 쌓이게 되었고 카자르 왕조의 인기는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이같은 상황을 지켜본 영국인들은 영국 정부에게 보고하기를 영국이 철수하면 카자르 왕조는 러시아에게 정복되거나 시민 혁명으로 붕괴될 것이다며 보고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한편 나스레딘 샤는 1873년, 1878년, 1889년 유럽을 연달아 방문했다. 이 때 최초로 유럽을 방문한 근대 페르시아 왕이라 기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유럽을 돌아다니며 서양의 발전된 근대적 문화를 즐겼지만 정작 서구 문명을 도입하여 이란을 개혁하는 것에는 크게 관심갖지 않았을 뿐더러 그로 인해 이란의 재정은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나스레딘 샤는 첫 유럽 순방을 떠나기 1년 전인 1872년에는 영국의 파울 줄리어스 데 로이터(Paul Julius de Reuter, 1816~1899) 남작을 만나게 된다. 이 줄리어스 로이터는 세계적인 언론사인 로이터(Reuters)의 창립자로 알려진 인물로, 런던에서 전신 기술과 비둘기를 이용해 신속한 금융 및 뉴스 정보를 제공하는 통신사를 설립해 현대 언론 통신 산업의 선구자가 된 인물이다. 나스레딘 샤는 줄리어스 로이터에게 이란의 개혁을 맡겼으며 이란 전역의 도로, 제분소, 전신, 공장, 자원 등에 대한 통제권을 넘겼다. 그러나 이는 개혁이 아니라 이권을 팔아 치운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를 대가로 로이터는 5년 동안의 매출과 20년 동안 벌어들인 순이익의 60%에 해당하는 금액을 나스레딘 샤에게 지불하여 그의 환심을 샀다. 이는 당연하게도 이란 국민들에게 있어 엄청난 손해였지만 나스레딘 샤는 이를 국익을 위한 개혁이라 포장하며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란에서 로이터 남작 개인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력해질 것을 우려한 영국 정부는 마침내 이를 중단시켜 실제로 이러한 개혁들이 이란에 실현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확실했던 것은 이같은 약속을 쉽게 허용할 정도로 당시 카자르 왕실은 매우 무능했다는 것이다. 한편 이란의 쿠르드족은 이전 카자르 왕조 시기 때부터 그들이 머물던 지역에서 자치가 폐기될 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팔라비 왕조가 이란의 군주제가 이 시기에 폐지되었을 수도 있었는데 당시 카자르 왕조를 교체해서라도 잠시 수명을 연장시켜 놓았다고 보는 것이 무방하다. 카자르 왕조 제4대 샤한샤 나스레딘 샤 카자르(Nasreddin Shah Qajar)는 1890년 3월 20일 50년 동안의 담배 전매권을 영국의 G. F. 탈버트 소령에게 팔아 버리게 된다. 담배 매매의 대가로 탈버트 소령은 연간 이익의 4분의 1을 샤에게 납부하고 자본에 대한 5%의 배당금과 연간 15,000파운드, 현재 가치로 31억 원 정도를 매년 샤에게 떼주고 이 담배 밭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담배 전매권의 경우, 카자르 왕국의 주요 세금 수입원 중 하나였다. 따라서 나스레딘 샤는 이 담배 밭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영국에게 국가의 주요 수입원을 넘기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나스레딘 샤가 그렇다고 영국과 동맹을 맺어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이 수입원을 넘긴데 아니고 본인의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 영국에 팔아 치웠던 것이다. 페르시아에서만 나는 희귀한 담배 품종들이 존재하는데 이 품종들은 유럽이나 러시아에 수출하고 있던 상당한 가치를 가진 산업이었다, 그런데 이 품종들이 영국에게 넘어가면서 카자르 왕국이 수출할 수 있는 물품들이 사라져 버리게 된 셈이다. 


문제는 쿠르디스탄이라 불리는 이란 서북부 지역은 희귀한 담배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당수의 쿠르드족들이 문제였다. 이 농장주인 쿠르드족은 영국에게 이 사업이 넘어가면서 영국 지주들의 소작 지주로 변모한 셈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란인들은 담배가 주 기호식품으로 골초들이 많았다. 게다가 페르시아의 모든 담배 농사꾼들은 먼저 영국이 운영하는 전매 회사에 강제로 담배를 매매해야 했고, 이란인들은 그 회사에서만 담배를 사서 피울 수 있었다. 영국인들이 운영하는 담배 회사들은 이란인들을 착취하고 농장을 넘기지 않은 쿠르드족을 압박하여 말려 죽이기 위해 가격을 마구 높였고, 이란인들은 영국인들이 판매하는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해결 방법이 전혀 없었다. 당시 담배 농업에 종사하는 이란인들은 쿠르드족이 약 10만에 달했고, 기타 페르시아인까지 합치면 무려 20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나스레딘 샤가 담배 전매권을 영국에 팔아 넘기면서 이들의 생업에는 치명타가 가해졌다. 특히 쿠르드족 농부들의 평균 수입은 수직으로 하락했는데 자신들이 재배한 담배의 가격을 마음대로 정할 수도 없었고 키우는 담배의 양도 일일이 통제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수입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스레딘 샤가 체결한 이 조약이 이란 시민들에게 공개되자 당연히 엄청난 파장이 되었다. 


나스레딘 샤는 담배 농장 매각 조약을 적극적으로 밀어 붙였지만 테헤란, 이스파한 같은 주요 대도시들에서는 플래카드와 함께 대중들의 시위들이 벌어졌고 이들 쿠르드족 담배농들이 이 시위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1891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쿠르드족을 중심으로 시위들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쿠르드족 소농민과 일부 이란인 담배 판매업자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전개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슬람 성직자들이 가담하게 되니 그 규모가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불어나게 된다. 이슬람 성직자들 또한 만약 나스레딘 샤가 이와 같은 양보를 해주게 된다면 외세이자 열강인 영국이 이란에게 더욱 깊숙히 침투하게 될 것이라 우려했다. 따라서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영국과의 조약이 <꾸란>에 나타난 일할 수 있는 자유와 이동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면서 조약을 당장 폐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란 시민들에게 가장 높은 존경을 받는 성직자 그룹들이 나스레딘 샤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게 되니 시위는 더욱 거세게 불어나게 된다. 시위는 1891년 12월 이란의 최고 이슬람 권위자인 미르자 하산 시라지(Mirza Hassan Shirazi, 1815~1895)가 담배 사용을 금하는 칙령인 파트와(Fatwa)를 발표하자 시위는 점차 폭력적으로 치닫게 된다. 이에 테헤란 시민들은 적극적인 영국이 장악한 담배에 대해 불매 운동을 펼치게 되었으며 이러한 불매 운동은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시민들은 바자르와 시장들의 문을 닫고 정부와 샤에 저항했으며 나스레딘 샤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시도했지만, 만약에 시위대들을 무력으로 제압할 경우, 영국의 이란 담배 산업 독점을 두고 큰 불만을 품고 있던 러시아 제국이 이를 빌미로 침공해올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감히 폭력 진압은 시도하지 못했다. 당시 불매 운동이 매우 강력하여 심지어 나스레딘 샤의 하렘에 머무르고 있던 여성들조차 담배를 끊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평소 이란인들이 수입의 3분의 1을 담배 구매에 사용했으며 라마단 기간에도 빵을 먹지 않아도 파이프에 담배 채우는 일만큼은 적극적으로 지켰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매우 대단한 불매시위였다. 상황이 매우 심각해지니 나스레딘 샤는 1892년 1월 결국 영국에게 담배 전매권 판매를 취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담배 전매권 판매가 취소되었다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란은 영국과의 조약 파기로 인해 막대한 위약금을 물어야만 했다. 이는 약 500,000파운드, 인플레이션을 차치하더라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1,016억에 달하는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여기에 나스레딘 샤는 국민들에게 강제로 굴복했다는 모욕감에 본인 재산에 손해를 입었다는 분노까지 겹쳐 더더욱 폐쇄적인 성격이 되어 국민들에 반감을 갖게 되었고, 이 모든 것이 국민들이 서양 여행이나 서양식 교육 때문에 너무 많이 배워 똑똑해져서 그렇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스레딘 샤의 재위 말기에는 어떠한 형태의 서양 여행이나 서양식 교육을 모두 금지했다. 이 같은 행위는 팔레비의 쿠데타를 불러오는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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