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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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베드카르 광장 일대와 골든 템플로 가는 길에는 암리차르 학살(Amritsar massacre) 사건이 벌어진 곳이다. 이는 신사의 나라라는 영국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례인 곳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인도 국민회의를 위시한 인도 지식인 그룹들은 종전 후 독립시켜주겠다는 영국의 약속을 믿었고 수 많은 인도 청년들이 영국군에 들어가 유럽전선에서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 싸웠다. 그러나 종전 후 영국은 그 약속을 어겼고 전쟁 중에 개정된 인도 방위법(Defence of India Act)에 근거해 독립운동을 탄압했고, 1919년에는 롤랫 법(Rowlatt Act)을 제정해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판 없는 구금을 허용하기까지 했다. 이 롤렛 법의 정식 명칭은 무질서 및 폭동 처벌법(Disorder and Riot Punishment Act)으로, 당시 법률 제정에 관여한 인도 위원회의 위원인 시드니 롤렛(Sydney Rowlatt)의 이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영국 식민 정부는 영장 없이 인도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체포, 구금 및 재판을 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인도에 대한 탄압을 개시했다.

Jallianwala Bagh in Day light, 출처 : 위키백과, 암리차르 학살
당연히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펀자브를 초함한 인도 전역에서 반영 감정이 고조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암리차르에서는 인도인 선교사인 마르셀라 셔우드(Marcella Sherwood)가 지나가던 인도인에게 사소한 오해를 받아 구타당하다가 다른 인도인에게 구조된 사건이 발생했다. 선교사인 셔우드를 구해준 사람 역시 인도인이었지만 사건을 전해들은 펀자브 주둔 영국군 지휘관인 레지널드 다이어(Reginald Dyer)는 셔우드가 구타당했던 거리를 지나가는 인도인들은 무조건 바닥에 엎드려서 지나가라는 최악의 인종차별성 포고령을 내리게 된다. 1919년 4월 13일, 인도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펀자브 지방의 암리차르 시내 잘리안왈라 바그(Jallianwala Bagh) 공원과 템플 거리 등에서 15,000명의 군중들이 반영 평화 시위를 개최하고 있었다. 당일은 시크교의 축제 중 하나인 바이사키(Baisakhi)가 열리는 날이어서 많은 민중들이 집회에 참석해 있었다.
당시 치안을 담당했던 영국군 지휘관 레기날드 다이어(Reginald Dyer)는 모든 집회 시위를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렸으나, 축제 기간인 관계로 이러한 사실이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대중들이 이를 모르는 상황에서 집회는 계속 진행되었고, 다이어는 이를 진압할 목적으로 군중들을 향해 발포 명령을 내렸다. 10분여 동안 지속된 무차별 사격에 1,000여명 이상이 사살당하는 참사가 벌어 졌다. 총독부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총 379명이 사망하고, 1,2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망자만 1,000명이 넘어간다는 보고도 존재하고 있어 사망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발포한 병사들 대부분은 영국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시크교도 및 구르카 병사들이었다. 학살 소식이 퍼지면서 인도인의 영국에 대한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영국의 이런 야만스러운 행위는 당시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에 의해 대대적인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영국령 인도의 조사는 매우 비효율적이었으며 영국 하원도 이를 비난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지만 보수파들과 상원에서는 학살자 다이어를 영웅 대접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난했던 윈스턴 처칠도 과정을 보고 받고는 그냥 침묵으로 일관했고 하원도 다이어를 심문하기 위해 청문하는 과정에서 학살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하기도 했다. 다이어의 행위는 도시 수호를 위한 정당방위라는 것이다. 이러한 영국의 다이어 옹호는 인도 대중 사이에서 영국에 대한 분노를 부추겼고, 이는 1920~1922년 이어진 마하트마 간디의 비협력 운동(Non-cooperation movement)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의 파장은 컸다. 학살 사건에 유감을 표한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는 영국에서 받은 기사 작위를 반납했다.
당시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던 다이어의 발포를 사후에 승인한 펀자브 주지사 마이클 오드와이어(Michael O'Dwyer, 1864~1940)가 이 학살이 있은지 21년 뒤인 1940년 우담 싱(Udham Singh)이라는 시크교 독립운동가가 쏜 총탄에 맞고 암살당했다. 이후 우담 싱은 체포되어 영국에서 재판을 받고 교수형으로 순국한 이후 훗날 인도에서 유명 독립운동가로 존경받으며, 영화를 비롯한 여러 매체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한 자와할랄 네루는 이 사건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반영 감정을 가지고 인도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한편 신사의 나라라는 영국의 민낮과 두 얼굴은 암리차르 대학살에서 그 진면목을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가 방문한 때가 암리차르 대학살 100주년 째 되던 해인 2019년이었는데 영국 정부는 단 한 번도 암리차르 대학살에 대해서 인도 정부와 시크교에 사과한 적이 없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97년 세 번째 인도 국빈 방문 당시 유감을 표명했지만 사과하지 않았고, 같이 온 필립 왕자는 자신이 다이어 장군의 아들을 만난 적 있는데 실제 사망자 수가 간판에 적힌 것과 같이 많지 않다고 망언하여 인도 전역에 또 다시 반영 운동 불씨를 지폈다. 2013년에는 영국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 또한 암리차르를 방문하여 미안하다는 표현없이 유감을 표명했다. 이후에도 영국 왕실은 방문 하지 않고 총리들도 유감 수준으로 끝났기 때문에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2021년 크리스마스 때 한 인도인이 암리차르 학살의 복수를 위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암살하려고 침투했다가 잡혀서 9년형을 받았다. 그리고 2019년도 마찬가지로 영국 정부는 대학살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2019년 암리차르 학살 100주년 되는 해로 4월 13일 100주년에 맞춰 추모식을 비롯한 다양한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과연 학살자 영국은 인도와 암리차르 시민들에게 사과를 했을까? 당시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크교 사원을 다녀오면서 필자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