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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마케도니아 지역 테살로니키는 좌파 명문 파판드레우 가문의 본거지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4 22:01:35

테살로니키는 그리스 좌파 명문 파판드레우 가문의 본거지이다. 파판드레우 2세는 반(反) 군부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뒤 민주화가 되면서 1981년~1989년, 1993년~1996년에 걸쳐 두 차례의 총리를 지냈다. 파판드레우 2세는 그리스의 민주화 정착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의 치세 당시에는 그리스의 경제가 오일쇼크 때 보다 나아지기는 했지만 1950년대~1970년대 초반, 군사정권 당시의 고성장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당시 그리스의 청년 실업률이 10%에 달했다. 이에 비슷한 시기로 놓고 본다면 이탈리아나 스페인도 그리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당시 스페인이나 이탈리아가 경제적으로 3~4%대의 성장을 이루기는 했지만 오일쇼크 이후의 경제 재편의 후유증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청년실업률이 두자리 수를 기록하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파판드레우 가문, 3대째 총리를 배출한 대를 잇는 좌파 명문 가문이다.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또한 그의 부인과 이혼했는데 그 또한 사람이자 개인사의 문제인지라 이혼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인과의 이혼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파판드레우 2세는 전 부인에게 막대한 위자료를 지불했는데 이것이 국민 세금 및 공금을 횡령하여 지불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자 큰 논란이 되었다. 게다가 승무원 출신의 34세 이혼녀와 불륜까지 저질렀으며 이어 "범그리스 사회주의 연합" 당의 중추들이 크레타 은행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거의 대부분 여기에 관련이 되어 실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파판드레우 2세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지는 않은 편에 있다. 그나마 민주화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경제 정책의 실패와 부정부패 및 각종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민주화 투사가 아닌 총리로써 파판드레우 2세는 사람들에게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상대 정당인 신민주당도 당시 국민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좋은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파판드레우 2세는 1996년에 죽을 때까지 총리직에 재직할 수 있었다. 범그리스 사회주의 연합은 파판드레우 2세가 사망한 뒤에도 계속 집권 정당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리스의 경제는 거의 파탄 상태였으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국고를 탕진하다시피 했다. 그러니 제대로 된 복지 정책이 돌아갈리가 만무했다. 2004년 총선 당시 올림픽을 유치했다는 것 때문에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던 정당이 유리할 것이라는 에측이 있었다. 그러나 선거 도중에 거액의 올림픽 개최 비용 문제와 더불어 당시 10%를 넘던 고질적인 높은 실업율 문제가 쟁점이 되면서 궁지에 물리게 되었고 그리스 신민주주의 당은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 당 정권을 제압하고 오랫만에 집권하는데 성공했다. 


신민주주의당은 집권하면서 관광 산업에 대한 호황과 부동산 활황을 바탕으로 연 4%대의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이끌어 내었고, 긴축 정책도 충실히 수행하면서 그리스를 잘 이끌어나갔다. 지금이야 빈부격차가 커졌다는 문제 등으로 엄청나게 비판을 당하게 된 신민주주의 당의 경제 정책이었지만 당시 EU로부터 긴축 정책의 모범국으로 칭송받았을 정도로 2000년대 초중반까지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6년에 파판드레우 2세의 아들인 파판드레우 3세가 미국에서 그리스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세운 범 그리스 사회주의 운동 당에 입당했으며 때마침 그리스 전역으로 대규모 산불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신민주주의 당은 산불 진화에 대한 미흡한 대처로 인해 그리스 내에서 지지율이 떨어졌지만 경기가 활황이었기 때문에 재집권에 성공했었다. 


2008년에 거품 경제 붕괴가 가시화 되고, 청년 실업과 저임금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면서 그리스는 다시금 엄청난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범그리스 사회주의 연합은 파판드레우 2세가 사망한 뒤에도 계속 집권 정당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리스의 경제는 거의 파탄 상태였으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국고를 탕진하다시피 했다. 그러니 제대로 된 복지 정책이 돌아갈리가 만무했다. 2004년 총선 당시 올림픽을 유치했다는 것 때문에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던 정당이 유리할 것이라는 에측이 있었다. 그러나 선거 도중에 거액의 올림픽 개최 비용 문제와 더불어 당시 10%를 넘던 고질적인 높은 실업율 문제가 쟁점이 되면서 궁지에 물리게 되었고 그리스 신민주주의당은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 당 정권을 제압하고 오랫만에 집권하는데 성공했다. 


신민주주의당은 집권하면서 관광 산업에 대한 호황과 부동산 활황을 바탕으로 연 4%대의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이끌어 내었고, 긴축 정책도 충실히 수행하면서 그리스를 잘 이끌어나갔다. 지금이야 빈부격차가 커졌다는 문제 등으로 엄청나게 비판을 당하게 된 신민주주의 당의 경제 정책이었지만 당시 EU로부터 긴축 정책의 모범국으로 칭송받았을 정도로 2000년대 초중반까지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6년에 파판드레우 2세의 아들인 파판드레우 3세가 미국에서 그리스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세운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 당에 입당했으며 때마침 그리스 전역으로 대규모 산불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신민주주의당은 산불 진화에 대한 미흡한 대처로 인해 그리스 내에서 지지율이 떨어졌지만 경기가 활황이었기 때문에 재집권에 성공했었다. 


2008년에 거품 경제 붕괴가 가시화 되고, 청년 실업과 저임금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면서 그리스는 다시금 엄청난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유로존 위기 때문에 2000년대 중반에 그리스가 엄청나게 혜택을 누리다가 급속도로 타격을 입었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실상 계층이나 세대별로 볼 때 그 혜택의 수위는 크게 달랐고, 빈민층의 경우에는 유로화 가입 이후의 물가가 급속히 상승하면서 상당한 불이익을 당해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부동간 값도 급상승하여 이를 제어하는데 있어 쉽지 않았다. 아일랜드나 룩셈부르크와 달리 그리스의 경우 특히 젊은 층은 2000년대 중반 경제 성장률이 높았던 시절에도 청년 실업률이 20%대에 달했고, 취직한다해도 저임금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다. 2000년대 중반 당시에는 최저임금이 750유로였는데 그리스는 최저임금이 592유로로 떨어진데다가 청년실업률이 거의 60%에 달하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그러나 이 정도 수준의 임금도 감사한 상황인 2010년대 암혹기에 비하면 한참 나은 상황이기는 하지만 청년실업과 저임금 문제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던 차에 과잉진압으로 시위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분노한 청년들의 시위가 계속해서 발생하면서 신민주주의당의 지지율은 크게 떨어지게 되었고 결국 2009년에 조기총선을 치르게 되면서 파판드레우 3세가 이끄는 범 그리스 사회주의 운동 당에게 정권을 넘어가게 되면서 개헌 저지선을 밑도는 참패를 당하게 된다. 이에 파판드레우 3세는 총리가 되면서 파판드레우 가문의 3대가 총리 자리를 가져 가게 되었다. 즉, 할아버지, 아버지, 본인까지 3대가 모두 그리스의 수장인 총리가 되었던 셈이다. 게다가 또 파판드레우 3세도 좌파 성향의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파판드레우 가문은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좌파 명문 가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대를 이어 좌파를 하고 있는 것도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몇 안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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