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238185&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빨치산의 태평소 소리 좋아했던 미군, 국악의 전도사가 되다[이희용의 월드코리안 12] 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민족·국제 이희용(hoprave)▲가야금 타는 해의만만년의 해...
리비아는 당초 이스라엘의 위협을 겨냥하여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1969년 집권한 무아마르 카다피는 강력한 반(反) 이스라엘과 반(反) 서구를 주창했던 인물이다. 한편 리비아가 견제하는 이스라엘 정부는 핵무기 보유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실제로 핵실험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실험실에서 충분한 핵무기 제조 기술을 습득했고, 시뮬레이션을 통해 핵 위력에 대한 감정을 했을 것이라는 것이 국제 사회의 정설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핵 실험을 했던 이유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모델이 없어서라기보다 적대국에게 보여주면서 간접적인 위협을 가해 자신들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게 하려는 심리적인 압박이었다. 때로는 국제 관계에서 이같은 연출을 보여줄 필요도 있는 법인데 북한의 경우, 이를 의도적으로 노출하여 적대국들에게 일종의 "시위"를 한 셈인 것이다.

Uranium processing plant in Utah, US. RJ Sangosti / Media News Group / The Denver Post via Getty Images
리비아는 1975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다. 이후 카다피 시대가 도래하면서 내부적으로 비밀리에 핵 개발을 추진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의하면 리비아의 핵 프로그램 수준은 초보적인 단계에 있었고 핵무기가 완성되기까지는 최소 3~7년 정도가 필요하다고 보있다. 그러나 1988년 영국 스코틀랜드 로커비에서 발생한 미국 팬암 항공 소속의 여객기가 공중에서 폭파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국은 이 사건이 리비아가 연관되어 있다고 판단하고 관련 용의자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카다피는 이를 강하게 거부했다. 결국 미국은 리비아를 테러지원국가로 지정하고 경제 제재에 돌입하게 된다. 그리고 미국은 1992년과 1996년, 두 차례에 걸쳐 리비아의 석유 수출을 규제하는 제재를 부과하면서 해외 자산 또한 동결시키게 된다. 이와 사상 초유의 제재 조치에 UN도 동참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재는 결국 리비아가 핵 개발에 하는데 있어 필요한 자금 조달을 어렵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그리고 2003년 3월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어 사담 후세인이 체포되자 카다피는 미국이 리비아도 공격할 수 있다고 심각하게 우려했고, 후세인의 전철을 밟지 않을지 두려워했다. 그래서 카다피는 영국 비밀정보국 MI6을 통해 미국과 영국에 특사를 보내 모든 대량살상무기(WMD)를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2003년 4월부터 미국과 리비아의 비밀 협상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핵 추진 과정과 모든 프로그램에 대한 공개를 요구했다. 그러자 리비아는 핵 프로그램을 미국에 모두 공개했으며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TBT)에 가입하고, IAEA의 사찰도 받았다. 따라서 2003년 12월 리비아는 공식적으로 핵무기를 포함한 모든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공식적으로 천명하게 되었다. 이후 리비아에 대한 비핵화는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스커드 미사일 등 핵미사일 장비를 미국으로 이송했으며 원심분리기 등 리비아의 핵무기 제조 장비와 관련 서류 총 25톤 가량이 미국 테네시 주 오크리지 국립 연구소 창고로 옮겨졌다. 2005년 10월 리비아의 핵 프로그램은 완전히 폐기됐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미국 2004년 2월 리비아에 대한 경제제재 등을 해제했다. 6월 리비아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여 미국은 24년 만에 외교관계를 회복했다. 이어 같은 달에 미국은 리비아를 25년 만에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했다 2004년 9월, 리비아에 대한 경제제재는 공식 해제되었다. 리비아가 '완전한 핵 포기'를 선언한 뒤 실제 핵 프로그램이 폐기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1년 10개월이다. 리비아가 확실한 핵 포기 의사를 보이며 IAEA의 포괄적 사찰을 바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복잡한 검증 단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러나 이같은 보상 뒤의 최후는 아주 비참했다. 2011년 서방의 색깔혁명으로 기획된 아랍의 봄이 발생하면서 내전이 발생했고, 카다피는 미국이나 서방에 버림받았다. 미국이나 서방은 리비아의 핵이 해체된 마당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고, 마음에 들지 않았던 카다피를 제거하기 위해 반군을 지원했다. 아랍의 봄이자 리비아 내전이 일어났던 1월에는 작은 시위에 불과했었지만 벵가지 일대에서 2월 17일부터 전국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2011년 이집트 아랍의 봄 시기에 카다피의 고향인 시르테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에서 카다피를 타도하자는 시위가 벌어지게 되었으며 수도 트리폴리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카다피는 2월 22일에 알-자마히리야 TV를 통해 자신은 공식적인 자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물러나거나 줄 수도 없다고 밝혔다. 더불어 카다피는 영원한 혁명의 지도자이며 자신의 조상 땅인 리비아에서 순교자로 죽을 것이라 했다. 결국 2011년 리비아 반정부 시위는 최악의 국면으로 흘러갔다. 반군이 된 일부 시민들은 무기고에서 무기들을 탈취하고 무장조직을 결성해서 동부 지역에 무장투쟁을 하거나 폭동으로 번지게 되었고, 카다피가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박격포와 미사일로 무장해서 진압하면서 이는 내전으로 심화된다. 그러자 3월 18일 UN 안전보장이사회가 15개국 중 중국, 러시아, 독일, 인도, 브라질 등 5개국을 제외하고 나머지 국가들의 찬성으로 인해 리비아에 비행 금지 구역을 선포했다. 그에 따라 프랑스군이 리비아군에 대한 폭격을 시작했다. 결국 서방 세계와 카타르, 이집트, 아랍에미리트, 요르단 등 평소 카다피를 좋지 않게보던 아랍 연합 또한 공격에 가세했다. 이 국가들은 오디세이 새벽 작전(Operation Odyssey Dawn)을 선포하며 프랑스의 첫 폭격을 시작으로 카다피군에 대한 공습을 개시하였다.
카다피의 고향인 시르테에서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고, 완전히 승기를 잡은 반군은 카다피군에게 항복을 권고하면서 협상 시한을 제시했다. 이 와중에 카다피의 아내 사피아 파르카시(Safia Farkasi)와 딸 아이샤, 두 아들 무하마드와 한니발은 알제리로 도피했다. 시르테는 치열한 교전 끝에 반군에게 함락되었고 2011년 10월 20일 도주하던 카다피는 나토군 무인기의 공습을 받아 하수도로 피신했다가 반군에게 체포되어 끌려나와 집단 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이동 중 머리와 복부에 총상을 입고 절명하게 된다. 이것이 리비아 핵을 포기하였기에 아랍의 봄의 광풍에 휩쓸려 리바아 내전이 발생했고, 카다피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배경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15년 후, 2026년 현재 이란의 하메네이 정권은 리비아와 유사한 방식의 협상을 종용받고 있다. 2026년 정초의 이란 시위는 민주화보다 민생고와 더불어 경제 침체 및 장기간에 걸친 하이퍼 인플레이션 문제 때문에 발생했었다. 2011년 1월의 리비아에도 민주화보다는 체포된 인권운동가 석방과 인권 개선 및 민생고나 부족 갈등 문제 때문에 벌어진 시위였다. 그러고보니 공교롭게도 2011년 리비아 시위, 2026년 이란 시위도 모두 정초에 발생한 일이었다.
일단 시위도 실패했고 핵 협상 또한 깨졌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끊임없이 이란과 딜을 보겠다고 한다. 그러나 카디피와 리비아가 2003년에 핵을 포기하고, 2011년에 내전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며 현재까지도 리비아 내전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란과 하메네이가 여기에 합의할 리는 만무하다. 핵을 포기하는 순간, 이란은 미국의 제재에서 풀려나고 경제가 잠시 숨을 트일 수 있겠지만 곧 카다피처럼 제거될 것이리는 것을 하메네이가 모를리 없다. 그리고 리비아처럼 15개의 소수 민족이 존재하는 이란의 다민족 구조라는 특성상 내전이 안 벌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혹자는 이란이 페르시아 문명의 문명국이었고, 시민들의 수준이 높기에 리비아와 다르다고 하지만 이란만큼 과거 화려한 문명을 가졌던 다마스쿠스의 시리아를 보자. 시리아 국민들도 이란 국민들만큼 수준이 높고,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던 국가였으며 다마스쿠스는 바그다드와 함께 한 때 중동 이슬람 문명과 상징과도 같았던 도시였다. 그런 시리아 또한 아랍의 봄으로 정권이 타도된 뒤, 현재까지 15년 넘게 내전을 벌이고 있다. 즉, 이란은 다를거라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남은건 피로써 해결하는 방법 밖에 없게 된다. 여기까지 온 이상 미국과 트럼프도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뭔일이 난다면 최후 통첩 후 3~4일 이내로 사단이 벌어지긴 할 것이다. 그 기간은 길면 일주일에서 10일, 짧으면 3~4일 내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전쟁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슬프게도 이미 전쟁의 초읽기가 시작되었다. 여러분들은 유가 급등을 생각해서 필요한 만큼의 원유, 달러 현황이 어찌될지 모르니 달러나, 금 보유량을 늘리고, 증시도 확인하면서 다가오는 환란에 대비하는 것이 좋을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