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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세기에 걸친 130년의 역사에서 꾸준히 아랍 지도부를 제거한 집단서방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5 21:07:42

- 이라크 왕국의 국왕 가지 1세 암살의 미스테리

- 이라크 국왕 가지 1세 암살의 배후는 영국

- 집단서방과 미국의 중동 지도자들 참수, 그러나 망한 국가나 조직은 아무도 없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 지친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Rashid Ali Al Ghailani)와 황금 광장을 중심으로 한 이라크의 민족주의자들과 황금 광장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권을 잡은 이들은 친 영국 정치인을 체포하고 독일에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또한 독일이나 이탈리아에 가입하여 영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한 달도 안 되어 패배하였고, 이라크는 영국에 항복하여 독일이나 이탈리아 연합국 중 가장 먼저 항복한 국가가 되어 버렸다. 영국은 이라크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여 이라크를 괴뢰 국가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영국은 1948년까지 이라크를 통치하다가, 1948년 영국-이라크 조약을 통해 이라크는 주권을 되찾고, 1955년 바그다드 조약을 통해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되었다. 이라크는 1958년 요르단과 연합하여 아라비아 연방을 설립했다. 

이라크 왕국의 국왕 가지 1세의 장례식, 출처 : 러시아 모스크바 레닌 도서관 서고의 이라크 관련 자료에서 필자의 직접 촬영

그러나 1958년 여름 요르단의 국왕 후세인 1세가 레바논 위기로 인해 군사 지원을 요청하자 이에 파병되는 이라크 군을 이끌던 육군 장교 아브드 알 카림 카심(Abd Al-Karim Qasim)이 7월 14일 바그다드로 방향을 돌려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파이살 2세 국왕과 왕실 근위대를 항복시켰다. 결국 아라비아 연방은 해체되고, 이라크에는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파이살 2세를 비롯한 왕족들은 총살당했다. 그러나 카심도 불과 5년 뒤, 바트당 쿠데타로 역시 총살당했다. 하지만 왕정이 군부 쿠데타로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에 이라크가 쿠데타와 전쟁, 내분으로 혼란을 빚게 되자 영국에 망명 중인 이라크의 하심 가문의 수장 샤리프 알리 빈 알 후세인(Sharif Ali Bin Al Hussein)을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시켜 입헌 군주제로 개헌하여 왕정을 복귀시키자는 이야기가 이라크 국내에도 소수이긴 하지만 존재하고 있다. 

샤리프 후세인은 메카의 태수 후세인 빈 알리(Hussein Bin Ali)의 3남으로 알려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 장교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 1888~1935)의 협력을 받아 오스만투르크 제국 치하의 아라비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아라비아 반란을 이끌었다. 결국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세력을 몰아냈고, 오스만투르크가 다스리던 지역은 영국과 프랑스의 군정을 받게 되었다. 1920년 파이살이 다마스쿠스에 입성하여 시리아 아라비아 왕국 수립을 선포했으나 시리아를 자국 영토로 편입시키기를 원한 프랑스가 군사력을 동원해 왕국을 진압했고 결국 4개월 만에 왕좌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그 대신 영국의 지원을 받아 1921년 이라크 국왕으로 즉위했고, 1932년에는 주권 국가 이라크 왕국을 건국했다. 이라크가 수니파, 시아파 두 교파로 양분되어 대립했으나 그는 별 문제 없이 나라를 다스렸다. 1933년 승하하여, 유일한 아들인 가지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가지 1세는 1912년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인 헤자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후세인 1세로 아라비아의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영국의 제안을 믿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했으나 영국인들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가지 1세는 젊어서부터 반영 감정을 품게 되었다. 그는 영국 헤로 스쿨(Hero School)에서 1년 동안 유학했으며 이어 샌드 허스트에서 더 짧은 시간 동안 유학했다. 영국 유학 기간 동안 더욱 심한 반영주의자였으며 의심이 많고 포악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 이후 귀국하여 이라크 사관학교를 졸업했는데 성적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았으나 승마와 기계 조작에 있어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1932년 부왕인 파이살 1세가 유럽을 방문하는 와중에 영국인들의 사주를 받은 아시리아 인들이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파이살 1세가 자주적인 이라크를 건설하려는 것에 불만을 품은 영국이 왕정을 약화시키기 위한 술책의 일환으로 벌인 것이었다. 

가지 1세는 이라크 정계와 지식인 사회에서 확장되는 반영 운동에 동조하여 영국의 목표는 이라크를 파멸시키거나 노예화하기 위해 이라크 정부를 약화시키는 것에 있다고 판단해 아시리아 인 폭도들에게 공습을 감행했다. 가지 1세는 아시리아 인들의 폭동을 진압해 영국의 음모를 분쇄한 민족적 영웅이 되었다. 1933년 파이살 1세가 서거하자 가지 1세가 이라크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반 문맹으로써 학식이 높지 않고 군대가 민간 정치권보다 우월하다고 여긴 가지 1세는 군주로서 적합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국민적인 인기는 대단하였다. 가지 1세는 정치보다는 아시리아 폭동 진압의 영광을 누리는 데 집중하여 국민들을 자주 만나며 인기를 과시했고 군복을 입고 공개석상에 나타나 반영파 장교들을 규합하였다. 이 때부터 이라크 정계는 군부와 국민의 지지를 받는 가지 1세와 영국의 지지를 받는 상류 계층 정치인 및 지방 부족들의 대결장이 되었다. 1934년에서 1935년에 걸쳐 친영파의 사주로 가지 1세에 반대하는 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가지 1세는 이를 모두 진압하게 된다. 

1936년 가지 1세는 아시리아 폭동을 진압할 때 활약한 바크르 시드키(Bakr Sidqi) 장군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를 지원하여 친영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1937년 가지 1세는 자신의 특기인 기계 조작 능력을 활용하여 알 주아워(Al Juawor) 궁전에 라디오 카스르 알 주아워(Qasr Al Juawor) 방송국을 설립했다. 그는 군 장교들과 함께 방송에 출연하여 아라비아의 이념과 반영주의를 중동 전역에 선전하였다. 가지 1세의 방송은 시리아, 요르단, 팔레스타인, 쿠웨이트 등 방송이 연결되는 모든 아라비아 지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되었고 가지 1세는 아라비아 지역 최고의 명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또한 가지 1세는 쿠웨이트와의 합병을 추진했으며 쿠웨이트 입법위원회 위원 14명 중 10명으로부터 이라크와의 합병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받아 내었다. 이는 가지 1세의 인기와 쿠웨이트의 반영주의가 결합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여기에 가지 1세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을 추진하자 영국은 가지 1세를 크게 경계하여 이라크 주재 영국대사 모리스 패터슨(Morris Peterson)을 통해 알 주아워 방송국 폐쇄를 요청했지만 가지 1세는 패터슨의 면담을 거부했다. 

이에 분노한 영국 정부는 공공연히 가지 1세의 제거를 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1937년 친위 쿠데타를 주도한 바크르 장군이 암살당하자 추방되었던 친영파들이 대거 귀국하였다. 전 수상 누리 사이드(Nuri Pasha Al-Said)의 아들 사바 사이드(Saba Al-Said)를 비롯한 친영파 정치인들은 가지 1세를 제거하자고 주장했는데 섭정 위원회 설치, 가지 1세의 삼촌 제이드의 옹립 등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영국은 가지의 사촌인 친영파 압둘 일라흐(Abdul Ilah)를 즉위시킬 것을 주장했다. 1939년 4월 3일 심야, 참모 2명과 함께 운전을 하던 가지 1세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가지 1세는 황급히 후송되었으나 끝내 4월 4일 아침에 불과 27세를 일기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신주를 들이 받아 교통사고가 일어났다는 공식적인 발표와는 달리 가지 1세의 차량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으며 가지 1세가 과속을 했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없었고 가지 1세의 죽음을 초래한 머리의 부상은 자동차 사고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의 시신을 부검한 사에브 사카트(Saeb Saqath) 박사도 가지 1세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사망증명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내무장관 나지 사카트(Nhaji Saqath)는 친영파들의 압력으로 인해 사건을 종결해야 했으며 다시 권력을 장악한 친영파들은 사건 재수사를 철저히 금지했다. 그리고 사건을 자세히 조사하여 밝히려는 사법부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가지 1세가 사망하면서 4세 밖에 되지 않은 파이살 2세가 이라크의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이에 대한 이라크 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가지 1세의 장례식 행렬에 바그다드 시민들은 누리 알 사이드를 향해 “당신은 가지 왕이 흘린 피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سوف تدفع ثمن الدم الذي سفكه ملك الباذنجان!)”라고 울부 짖으며 왕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외쳤다. 이에 1941년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가 친영파에 대한 쿠데타를 벌이고 추축국에 가입해 영국과 잠시 전투를 벌이는 등 반영 소요 사태가 계속 발생하게 된다. 결국 이라크 왕국은 왕국의 구심점 노릇을 할 수 있던 가지 1세가 조기에 사망하면서 사실상 붕괴되었고 이라크 왕국은 1958년에 멸망했다.

이처럼 집단서방과 미국의 속성의 적의 지도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20세기부터 지금까지, 1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많은 아랍 국가들과 헤즈볼라, 하마스, 그리고 최근에는 이란의 하메네이와 이란의 지도부들을 제거해 왔다. 그러나 지도부가 제거 되고 나서 멸망한 국가나 조직은 아무도 없다. 뉴스나 언론에서는 현재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란의 누군가 제거되었다며 열을 올리고 당장이라도 망할 것처럼 뉴스를 내보내지만 이들은 죽고 나서도 바로 바로 지도자를 대체해 항전했다. 지도자를 제거하고 나서 올린 성과도 거의 없고, 지역 민중들의 분노만 자극했다. 지금 당장 중동이나 이란에 강한 공격을 퍼붓고 있지만 강한 소나비는 우선 피하고 보는 법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중동의 어떤 전쟁이든 초반에는 강하게 퍼부었다. 지도부의 지도자들도 제거하고 있지만 이제 전쟁은 8일에서 9일째로 흘러간다. 중동 아랍 국가들도 마찬가지지만 이란도 꽤 장기적으로 버텼다. 이란 또한 자국 영내에서 돌아다니는 이스라엘의 전투기들을 상당수 요격했다. 어떤 곳에서는 제공권 장악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지만 미국이나 이스라엘 전투기들도 많이 없고 미사일이나 드론들만 퍼붓고 있는데 무슨 장악이라는 얘기가 나올까? 반면 이스라엘의 텔아비브는 피해가 심각한 상황이다. 

현재 미국이 목표한 것이 있다. 

1. 하메네이와 이란 신정정권 지도부 완전히 제거

2. 이란 신정정권을 시민들의 손으로 뒤엎고 친미정권 만들기

3. 이란 핵 프로그램 완전 절멸

4. 이란 내 미사일 기지 완전 제거 

5. 호르무즈 해협 봉쇄 해제

이 5가지 중 성공한 것은 "하메네이와 이란 신정정권 지도부를 일부 제거"한 것 뿐이다. 신정 정권의 대체 지도자들은 살아 있다. 종교지도자인 대아야톨라 알리 레자 아라피, 이란 사법지도자인 골람 모세인 모세니 에제이, 최고지도자 대행 알리 라리자니, 대통령 마슈드 페제슈키안, 외무장관 압바스 아라그치, 최고 지도자로 확정될 모즈타바 하메네이까지.. 아직은 잘 살아 있으며 국정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을 죽인다 해도 또 대체자가 나올 것이며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1억이 넘는 시아파 전체를 죽이는 한, 계속 대체자는 나오게 되어 있다. 그리고 목표들을 모두 달성하지 않는 한, 이 전쟁의 끝은 없다. 미국 또한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 했으며 이란도 협상하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둘 중 하나는 끝나야 하는 싸움으로 전에 언급했듯이 이 전쟁에서 미국이 물러서면 패권이 흔들리고, 이스라엘이 패하면 방공망의 약점이 그대로 도출되어 종이호랑이로 떨어진다. 이란이 패배하면 정권교체 및 이란 내 소수민족들의 독립으로 인해 국가가 과거 유고슬라비아처럼 갈갈이 찢기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 국가 모두 목표 달성을 위해 조금도 물러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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