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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입장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오니즘을 끝장내야 비로소 끝난 것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5 21:19:01

미국은 먼저 셀프 종전 했다지만 이란은 여전히 전시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제 남은 것은 이스라엘이다. 미국이 떠나게 되면 그 배후도 치면서 이스라엘을 완벽히 재기 불능으로 만드는 것이 이란의 목적이다.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을 격멸하고 선민사상으로 뭉친 유태인들의 정신을 뿌리 뽑겠다는 것이 이란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와 시오니즘 사상이 살아 있는 한, 이란에 대한 위협은 꾸준히 증가하게 될 것이며, 그 악성 종양을 제대로 제거하지 않으면 나중에 제거하려 했을 때 이미 늦을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란 입장에서도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음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최초의 근대적 보수주의자로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알려진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는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1790)에서 "All that is necessary for the triumph of evil is that good men do nothing (선의 방관은 악의 승리를 꽃피운다)." 라고 했다. 물론 이란이 선이라 보기엔 어렵지만 유태인 시오니스트라 불리는 악(惡)이 자라나는 것은 중동 내에 또 다른 종양을 키우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Demonstrators protesting the Israeli government’s planned judicial overhaul, outside the official state ceremony celebrating Israel’s 75th Independence Day, at Mt Herzl, Jerusalem, April 25, 2023. 출처 : Arie Leib Abrams / Flash 90

19세기 서양에서는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시오니즘이 유태인 사회에서 새로운 근대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고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반유태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앙금을 목격한 유태계 오스트리아의 기자인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의 제창으로 인해 국제적인 시오니즘 협회가 창설되었다.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토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의 이주를 원하는 유태인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폴란드 일대의 중부 유럽 지역에 뿌리를 깊게 내린 유태인 좌파 노조들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착취와 제국주의적 폭압으로 인해 붕괴된 유럽을 버리고 유태인들만이 평화롭게 거주할 수 있는 새로운 지역을 개척해야 한다는 분위기들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의 포그롬이 심각해 지면서 동유럽 유태인들의 경우, 생존이 불가능한 처지가 되자 대규모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동유럽 유태인들의 대다수는 미국으로의 이민을 선택했고, 이들은 모두 알다시피, 미국 정, 재계의 주류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일부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고향을 회복하자는 시오니즘에 동조하여 팔레스타인 이민(Aliyah)을 결정하게 된다. 시오니즘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태인들이 조상의 땅이었던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태인 민족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던 민족주의 운동으로 이해하면 된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 건국됨으로써 시오니즘은 실현되었지만 아직 아랍 세력 및 팔레스타인과의 분쟁으로 인해 완전히 정착된 것은 아니다. 시온(Zion)이란 원래 예루살렘 시가지 내의 언덕 이름으로 예루살렘, 또는 이스라엘인의 땅을 의미하고 있으며 다른 의미로는 천국(Heaven)을 뜻하기도 한다. 시온주의, 시오니즘이라는 단어 자체는 1893년 비엔나의 유태인 대학생 지도자 나탄 비른바움(Nathan Birnbaum, 1864~1937)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실제 이 사상을 주창한 인물은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이다. 

한편 20세기 초, 영국에 의해 아프리카 유태인 국가 수립 계획인 <우간다 계획>이 발표 된다. 이에 대한 발단은 러시아의 반유태주의에서 시작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시온 의정서(The Protocols of the Learned Elders of Zion) 사건으로 인해 반유태주의가 극에 달하고 유테인들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다. 이같은 탄압을  견디다 못한 유태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을 탈출하여 유럽 각국과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는 당시 러시아 제국을 탈출한 유태인 중 약 7%에 해당하는 14만여 명이 영국으로 난민이 되어 몰려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시 영국 식민지 장관 조지프 체임벌린(Joseph Chamberlain, 1836~1914)이 시오니즘의 지도자였던 테오도르 헤르츨에게 영국으로 몰려드는 동유럽 출신 유태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영국령 동아프리카 마우 고원의 약 13,000㎢의 땅을 줄테니 그곳에서 유태인 국가를 건설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게 된다.

이같은 제안은 일명 '우간다 계획(British Uganda Programme)'이라 이름이 붙여졌지만 이와 달리 정작 정착을 제의한 해당 지역은 우간다가 아니라 케냐였다. 물론 해당 지역이 우간다 보호령에서 케냐로 이관된 얼마 안 되었을 시점이었기 때문에 당시를 기준으로 하여 이름을 "우간다 프로젝트"로 붙인 것이다.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유태인들의 상당수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식민지로 재이민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영국 입장에서 볼 때 완전 터무니없는 제안을 한 것도 아니었다. 1880년대 약 4,000여 명이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유태인 인구는 이러한 이주 계획으로 인해 1920년대 4만여 명까지 증가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주한 유태인들의 절대다수가 리투아니아에서 영국으로, 다시 영국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민한 사례였다. 이에 시오니즘의 창시자 테오도르 헤르츨은 1903년 바젤에서 열린 제6차 시오니즘 총회에 이 문제를 안건으로 올렸다. 

물론 스위스 바젤 회의에서는 이러한 이주 문제의 안건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비록 1897년 바젤에서 열린 제1차 시오니즘 총회에서 유태인 국가를 팔레스타인에 건설하기로 결정을 내렸던 상태였고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진행 중이었던 상황이기 때문에 굳이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느냐는 반대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이 본질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에 있었고 이미 그곳에는 유태인들보다 수적으로 훨씬 많은 아랍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더불어 이들이 외부에서 이주해오는 유태인들과의 충돌할 위험성도 컸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국가를 재건한다는 것은 영국과 같은 절대적인 강대국의 도움 없이는 요원하다는 현실론도 만만치 않았다. 1904년 시오니즘 총회는 세 명의 대표를 영국이 제안한 마우 고원으로 보내서 현지 사정을 파악하게 했다. 마우 고원은 적도 바로 아래 지점이었고 정착하기에는 아프리카 특유의 열악함이 존재했다.

세랭게티 초원을 누비는 사자와 같은 맹수들이 많있던데다 현지 원주민인 마사이족 등이 유태인들의 이주를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았기에 내부에서 대표들 간의 재논의를 거쳐 1905년 시오니즘 총회는 이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기로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된다.  아시아나 아프리카, 상관 없이 어디든 적당한 곳에 유태인들의 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하며 유태 영토주의 협회를 조직하고 세계 각지에 유태인 국가 수립을 모색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러시아에서는 연해주 북서쪽, 아무르 강 유역에 비로비잔 일대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고, 시오니즘 총회에서 팔레스타인 유태인 이주 제한 철폐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고집을 부려, 결국 팔레스타인 들어오게 된 것이 현재까지 이어진 비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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