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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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주의, 시오니즘이라는 단어 자체는 1893년 비엔나의 유태인 대학생 지도자 나탄 비른바움(Nathan Birnbaum, 1864~1937)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실제 이 사상을 주창한 인물은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이다. 헤르츨은 1860년 5월 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원이었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비교적 유복한 가정의 배경을 갖고 태어났다. 그러나 아무리 유복한 가정이 배경에 있다 할지라도 당시 유태인들은 심한 차별을 받고 있었던 시기였기에 그들의 주거지는 오늘날 안드라시 거리에 위치한 게토에 묶여 있었다. 헤르츨은 전형적인 유태인 가정으로 시나고그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의 인정을 받아 비엔나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당시에 법학을 전공하였으며 그 사이에 신문기자 겸 작가로 활동했다. 헤르츨은 결혼을 일찍한 편이었는데 그의 부인도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기에 헤르츨은 기자를 취미로 하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프랑스 파리에 특파원으로 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 목격한 드레퓌스 사건(Dreyfus Affair)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게 된다.

이스라엘의 국부(國父),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과 시오니즘(Zionism), 출처 : Israel Forever TV.
이 드레퓌스 사건이 단순한 누명으로 덮여질 수 없었던 이유는 프랑스 혁명의 본 고장으로서 반 유태주의가 유럽 도시들 중 가장 낮았던 프랑스에서 터진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헤르츨은 오스트리아 내에서 만연하고 있는 반 유태주의 등 각종 차별에 시달리다가 프랑스에 온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누명 사건의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18세기부터 유럽에서는 유태인에 대한 탄압이 줄어 들었던 편이었다. 이에 대표적인 사건이 프랑스 대혁명이었는데 대혁명으로 인해 절대왕정이 붕괴되면서 사회에 가장 밑바닥이었던 유태인들도 희망을 갖기 시작한다. 더불어 산업혁명으로 인해 자본주의가 생겨나고 자본주의 인식이 뿌리를 내리게 되면서 상업 행위가 뛰어난 유태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고리대금으로 벌어들였던 돈으로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짓고 그 부지를 매입하면서 유태계 비즈니스맨 1세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태인들은 폐쇄적인 유태인 공동체로 인해 유럽인들에게 이질감을 주어 차별을 받는다고 여겼고 카톨릭이나 개신교로 개종하거나 유태인들의 전통에 거리를 두는 등, 유럽에 동화되려는 태도를 취해 왔다. 이렇게라도 해야 당시 유태인들에 대한 심각한 차별이 줄어 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몇 세대들이 이어지며 유럽의 유태인들은 유태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희박해지고 있었고, 당시 사건의 피해자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 역시 스스로를 유태인으로 인식하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한 형편인데도 막상 유태인들이 이적 행위를 했다 여기게 되자 유럽인들은 유태인을 타자화하여 온갖 차별과 사회적인 낙인으로 그들을 대했다. 이와 같은 현실을 목격한 헤르츨은 아무리 유태인들이 유럽인이 되려 해도 유럽인들에게 완전히 받아들여질 수는 없으며, 유태인에게도 민족주의의 부활과 이를 매개로 할 나라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헤르츨은 유태인들에 관한 많은 사료들을 검토하게 된다. 그러면서 1896년 2월, <유대 국가 : 유대인 문제의 현대적 해결 시도(Der Judenstaat. Versuch einer modernen Lösung der Judenfrage)>라는 책을 집필하여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고, 같은 해 8월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인 압뒬하미트 2세를 찾아가 현 팔레스타인 지역을 독립국으로 승인하고 이 땅을 유태인들에게 넘겨 달라는 청원을 하게 된다. 그러나 술탄과의 면담은 비록 실패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헤르츨은 일약 시오니즘의 정치적인 지도자로 급부상하게 된다. 헤르츨은 시오니즘을 기준으로 유태인들의 단합을 호소했다. 그리고 나탄 비른바움(Nathan Birnbaum)을 만나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시온주의자 세계 대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스라엘 근대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이 "스위스 바젤의 시온주의자 세계 대회"는 엄청난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유럽인들의 차별로부터 시작된, 히브리인들의 전통, 문화, 역사의 복원이 시작된 원년을 1897년으로 잡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참고로 2017년, 예루살렘에서 시오니즘 창설 120주년의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헤르츨과 비른바움은 이 대회에서 "팔레스타인에 국제법으로 보장될 수 있는 유태인의 조국을 회복한다"는 선언이 나오게 된다. 이 선언문은 비른바움이 감수하고 헤르츨이 직접 썼다. 그리고 1904년에는 교황 비오 10세와 만나 시오니즘 운동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받았다. 당시 교황청은 이 시오니즘 운동을 굉장히 위험하게 보았고 예수를 못 박아 죽인 유태인들의 민족운동은 가당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후일 건국될 이스라엘을 위한 큰 업적을 이루었던 것과는 다르게 헤르츨의 가정사는 매우 불행했다. 당시 시오니즘에 호의적이었던 유태인들 대부분은 가난한 서민 계층이었기에 시오니즘 운동의 재정적 부담까지도 홀로 감당해야 했다.
이미 성공한 유태인들은 자신들이 기득권을 획득한 사회에 동화되어 공존하고 싶었고 이미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모두 버리고 새 땅으로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당시 유태인 재벌 중에 하나인 로스차일드 가문조차도 1902년까지 헤르츨의 시오니즘 운동에 전혀 관심을 갖기 않았다. 그로 인해 1897년 1차 시온주의자 회의에 참가한 16개국 대표들의 참가 경비마저 헤르츨의 사비로 충당해야 했을 정도였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아내의 지참금까지 털어서 사용했던 헤르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그는 시오니즘 운동을 전개하다가 1904년 44세를 일기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생활고에 시달렸고, 막대한 빚까지 졌기에 이를 갚기까지 무려 15년이 걸렸다. 결국 헤르츨의 막대한 빚은 나중에 시오니즘의 가치를 알아본 로스차일드 가문이 청산했다. 헤르츨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인 아내는 남편 사후 3년 후에 사망했다.
헤르츨의 자손 가운데 큰 딸은 헤로인 중독으로 사망했고 둘째 딸은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아들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보살폈지만 결국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자살하고 둘째 딸의 아들인 외손자도 자살하여 가문은 완전히 대가 끊기게 된다. 헤르츨은 살아 생전 이스라엘의 건국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묻혀 있던 유해가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이스라엘의 요청으로 옮겨져 안장되었고 예루살렘에 위치한 이스라엘 국립묘지는 헤르츨 산(הר הרצל)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다비드 벤 구리온, 하임 바이츠만과 함께 국부(國父)로 칭송받고 있지만 헤르츨은 벤 구리온이나 바이츠만보다 오늘날 이스라엘을 있게 한 國父로 예우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