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상당 부분 사라졌는지 모르지만, 예전에는 기업을 운영할 때 '이중장부'가 관행이었다. '이중장부' 란 진짜 장부는 금고 깊숙히 숨겨두고, 세무서나 투자자에게는 세금을 줄이거나 실적을 부풀린 '가짜 장부'를 보여주는 행위이다. 적발될 때 위험(Risk)이 큼에도 불구하고, 기업이 이런 행위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진짜와 가짜의 간극(Gap)이 클 수록 '이중장부' 의 유혹이 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는 탈세 및 비자금 조성 (이익 축소))에 있다. 실제보다 수익을 적게 잡고 비용을 부풀려 법인세나 소득세를 적게 내기 위해서다. 백이면 백, 남은 차액은 회사 공금이 아닌 개인적인 비자금으로 빼돌리기 위해서다. I.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신존재의 존재론적 증명'을 비판할 때 사용한 '내 주머니 속의 백 탈러와 개념적 백 탈러'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둘은 투자 유치 및 대출 (이익 부풀리기)을 위해서다. 회사가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손실을 숨기고 수익을 과다 계상 하는 것이다. 오늘 날처럼 주주 이익을 보장하라는 압박이 클 수록 진짜가 허접해도 가짜로 삐까번쩍하게 이미지 장식할 필요는 역비례로 커진다. 잘 나가는 척 해보여야 신규 투자도 받아들일 수 있고, 새로 고객들을 유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페북에서도 일어난다. 그것을 보면 인간은 우리가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상황 적응력이 크다. 현실의 이중장부에서 보이는 간극이 페북에서도 똑 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페북의 스피커들일 수록 이런 현상은 더 일반적이다. 사실 현실이건 가상(Virtual Reality)이건 작동 원리는 다르지 않다. <에세이철학회>를 개설해서 살피다 보니 이곳의 전문 칼럼니스트들의 글들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일 수록 '이중장부를 더 좋아하고, 더 쉽게 빠져든다.
이 '이중장부'의 원리를 통해 두 가지를 판단해볼 수 았다. 첫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진짜' (idea) 보다는 남들에게 보이는 '가짜(phenomena) 를 더 좋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저 깊숙히 혹은 저 멀리 있는 '진짜' 보다는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가짜를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말로는 명분과 정의를 앞세우면서도, 사실은 보이지 않게 추잡한 짓거리들을 더 많이 하는 경우다. 얼마 전에 세상에 알려진, 미국의 양심을 대표하는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N. Chomsky)와 억만장자 성범죄자 엡스타인(Epstein )의 관계가 그런 좋은 예이다. 둘 간의 밀접한 관계는 생각하기 어려운 이면의 거래를 짐작하게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플라톤은 좋게 보면 '순진한' 철학자이고, 나쁘게 보면 '얼치기' 철학자라 할 수도 있다. 왜 포스트 모던 계열의 철학자들이 플라톤을 패러디(parady) 했는지 알 수가 있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다"라는 플라톤의 말을 그들은 "영혼이 육체의 감옥이다"라고 뒤집어 버린다. 형이상학과 생물학의 전도된(inverted)관계이다. '밤 하늘에는 빛나는 별, 내 마음 속에는 양심'이라고 한 I. 칸트도 비슷하다. '본래성'과 '비본래성'을 나누는 20세기의 하이데거도 크게 그 차원을 벗어나 있지 않다. 오늘 날 적지 않은 이들이 떠 받들고 있는 한국의 다석 류영모 선생은 얼마나 '고대적'(archaic)인가? 다석은 결코 한국철학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다석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과는 다른 차원이다. 헤겔은 '성실한 철학자와 집시(Gypsy)의 대화에서 이런 부류의 철학자들을 조소한 적이 있다. 따지고 보면 <정신현상학>은 대단한 심리학서다. 이 책을 철학책으로만 보는 철학자들은 또 얼마나 순진한가?
둘째, 페북의 중독성(addiction) 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점이다. 사실 페북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탐닉하면서 놀기가 좋다. 모든 놀이는 자기가 좋아서 해야 더 재밌다. 그래서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라고 하는지 모른다. 거기다가 옆에서 박수라도 쳐주면서 장단 맞춰주면 더 신난다. 그러면서 서서히 중독에 빠져 들어가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것 모르는 것"처럼 알아챌 정도 될 때는 이미 심각한 상태이다. 나중에는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인지, 중독 때문에 하는 것인지 본인도 잘 모른다. 머리 좋은 자들이 헛소리를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 있다. 하지만 이런 행태는 제 3자의 눈에 잘 보인다. 장기나 바둑도 훈수 두는 사람이 더 잘보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중장부'를 막을 수도 없다. 첫째로, 억지로 막으면 더 은밀한 곳으로 숨어서 하거나 아예 진짜 필요한 활동을 포기할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진짜 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가짜를 더 좋아한다는 위의 말을 다시 생각해보라. 가짜는 인간의 원초적이고 생물학적인 본능에 기초해 있을 수 있다. 사실 모든 생명체들은 자유나 정의 같은 2차적인 원리 보다는 생존에 기초한 1차적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때문에 그냥 놔두는 것보다 억지로 막는 것의 리스크가 더 크다. 한 마디로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집 불태우는" 격이다.
두번째는 진짜와 가짜를 아예 분리시켜 버리는 것이다. 너는 가짜에 탐닉하면서 놀고, 우리는 진짜를 가지고 계산하는 것이다. 다소 번거로울지 몰라도 이것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합리적이라는 의미는 손익을 계산해서 각자 호주머니에 넣기가 좋다는 것이다. 굳이 도덕적 양심이나 정의를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둘 간의 간극이 크게 줄어들기 전까지는 이것이 위험부담을 줄이면서도 상황이 돌아가는 데 지장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선수들' 간에 짐짓 서로 간에 모르는 듯 돌리는 게임과도 같다.
경제적인 이유에서 작동하는 '이중장부'와 심리적/생물학적 이유에서 작동하는 원리는 서로 간에 차원이 다를지 몰라도 그 구조는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