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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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는 19세기 말까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곳이다. 스페인의 식민지로 존재하던 시절 쿠바의 주민 60~70% 가량은 크리오요 계급의 현지 쿠바에서 태어난 스페인 지배층의 백인들이었고 나머지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부려먹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흑인 노예와 스페인 지배층과 원주민인 인디언의 혼혈인 메스티소와 같은 유색인종들이었다. 19세기 말에 이르어 호세 마르티(José Martí, 1853~1895)와 같은 크리오요들은 독립운동을 주도해 스페인에 대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마르티는 1895년 스페인군과 전투 도중에 전사했고 쿠바의 식민지 독립 운동은 스페인 군에게 토벌되어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러나 쿠바 지역에서 세력 확대를 노리고 있었던 미국은 스페인을 약화시키기 위해 쿠바의 독립을 노골적으로 지원하게 되면서 쿠바와 미국의 악연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898년 쿠바 독립군을 지원하던 미국 전함 메인 호는 아바나 항에서 원인 미상의 이유로 폭발해 파손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물론 아바나 항 폭발사건은 미국의 자작극일 가능성이 높게 재기되었지만 아무튼 이를 계기로 미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개시하게 된다. 1898년에 발발한 미국-스페인 전쟁은 5개월 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고 스페인은 쿠바와 필리핀,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게 넘겨주게 된다.

REUTERS / Norlys Perez, Танкер на терминале Матансас, Куба
스페인이 패배하여 아메리카에서 철수한 이후 쿠바는 미국의 실질적인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미국은 쿠바에 군사 통치를 실시했으며 1902년에 미군은 군부 통치를 끝내고 철수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쿠바는 명목상으로 독립했다 하지만 미국의 내정 간섭은 끊이지 않았고, 이는 점차 쿠바 크리오요 계층의 지식인들의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이같은 미국의 내정 개입이 가능하게 되었던 이유는 1902년 미국이 철수하면서 제정되어 발표된 플랫 수정안(Platt Amendment)이라는 내용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플랫 수정안의 내용에 따라 미국은 쿠바에 해군과 육군의 군사 기지를 설치할 권리 및 쿠바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게 된다. 미국의 철수 이후 쿠바 공화국이 출범하였지만 이 공화국은 친미 정책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 들어 중남미 국가에 대한 선린정책을 주장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플랫 수정안’은 무효화 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선린정책을 표방한 이후 미국은 쿠바에 대한 직접적인 무력 개입은 자제했지만, 카스트로 혁명 이전까지는 쿠바 내 대다수 생산 시설을 미국이 소유하며 착취하는 등 경제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고, 그만큼 쿠바 시민들의 불만은 높아만 갔다. 1950년대 말 미국 기업은 쿠바 소재 광산의 90%, 공공 서비스 부문의 80%, 제당 산업의 40%, 은행 예치금의 25%를 소유하고 있었다.
비록 쿠바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지배적이긴 했지만 혁명 이전에 쿠바는 상당히 부유한 나라였고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특히 부유한 편에 속했다. 1950년대 쿠바의 1인당 GDP는 이탈리아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으며 공업 종사자의 임금도 급격히 상승했다. 여기에 미국 마피아들과 손잡고 아바나에 호화로운 호텔 여러 채를 건설하는 등 아바나를 관광지로 만들어 이른바 라틴아메리카의 라스베가스로 만들려고 했다. 공산 혁명 이전의 쿠바에 대한 찬사는 혁명 이후 미국으로 이주한 쿠바계 미국인들이 그 시절의 쿠바는 환상이었다며 극찬하기까지 했었다. 참고로 현 미국의 국무장관이 마르코 루비오의 집안도 공산 혁명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계 미국인 집단이었다. 하지만 쿠바는 급격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빈부격차와 부정부패도 심각해졌고 그러한 상황에서 총인구 600만 명 중 50만 명이 실업 상태에 몰려 있었다. 그리고 도시의 문맹률은 11%인데 반해 농촌의 문맹률은 41.7%에 달해 도시와 농촌의 격차 또한 매우 극심했고, 빈부 격차 또한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여기에 쿠바 수출의 80%를 차지하던 설탕의 가격이 1950년대 내내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맞이하면서 경제에 악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요인들은 자연스럽게 공산혁명에 대한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게 된다.
이후 공산혁명이 발생했고,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는 1959년 2월 16일 쿠바 총리가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카스트로가 가장 먼저 시행한 일은 미국계 기업과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일이었다. 이어 석유법과 대기업 국유화법을 제정하여 대다수가 미국인 소유로 되어 있었던 설탕 제조 회사 및 석유 회사들을 몰수하는 정책을 단행했고 집단 농장 운영을 통해 농업 생산을 장려하는 동시에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군비를 강화하여 미국의 침공에 대비했다. 집단 교육 프로그램에 의한 문맹 퇴치 정책을 통해 모든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교육과 양질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노력했으며 보건과 복지정책 향상을 통해 중남미 지역에서 최고의 의료 서비스와 주민 복지 정책을 추구했다. 그래서 공산주의 연구가들은 1960년대 말, 쿠바를 공산주의 이론을 가장 잘 실천한 국가로 간주했다. 반면 카스트로의 권위주의적인 독재 정책과 언론 장악 등, 그의 철권 통치로 피해를 입은 쿠바의 보수 세력들과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난민들의 많은 수는 미국 플로리다로 망명했다. 이들은 강력한 반공 성향을 보였으며 반(反) 카스트로 활동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쿠바 혁명과 그에 따른 개혁 과정을 주시하고 일단 지켜보기만 했던 미국은 1960년 7월부터 카스트로가 쿠바 내 미국인 소유의 재산들을 몰수하면서 마침내 경제적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양국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1961년 1월에는 국교 단절까지 했다.
카스트로는 미국과 대립하고 있었던 소련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에 주력했다. 소련 정부는 쿠바 혁명 정부를 미국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쿠바 혁명 정부 방위위원회를 발족시켰으며 이들은 카스트로에 대한 지원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대규모의 자문단들을 쿠바에 상주시켜 미국과의 대립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쿠바가 공산화 된 이후로 쿠바는 소련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국가 중에 하나였는데 이는 쿠바가 미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이에 있었던데다 그만큼 소련이 미국을 견제하는데 있어 매우 좋은 최적의 요건을 가진 나라였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존 F 케네디 정부는 카스트로를 제거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마이애미에 거주하던 쿠바 출신 젊은이들을 규합한 이후, CIA 요원들의 지도 아래 군사훈련을 시켜 쿠바 침공을 시도했다. 1961년 CIA 요원들에게 특수훈련을 받은 1,400여 명의 쿠바계 미국인 부대는 피그만 침공(Bay of Pigs Invasion)을 감행했다. 이 때 미국은 카스트로 정권을 매우 과소평가했고, 국가가 섬나라에, 영토가 작기 때문에 금방 전복될 것으로 믿었지만, 이 피그만 침공에 대해 소련의 정보원들이 이를 파악해 카스트로에게 알렸고, 이에 피그만에 침공한 부대원 중 100여 명이 쿠바군과 격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이어 나머지 군대 전원이 카스트로의 혁명군에게 생포되어 포로가 되는 등, 굴욕적인 참패로 끝났다.
피그만 침공으로부터 1년 반이 지난 후 카스트로는 미국과 협상을 했다. 카스트로는 미 정부에게 5,300만 달러 상당의 식량과 의약품을 받고 포로들을 미국에 송환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미국-쿠바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미국은 미주 기구를 통해 중남미 국가들이 쿠바와 외교 관계를 끊도록 압박하면서 쿠바를 고립시키고자 했다. 이와 같은 미국의 고립 작전에 큰 불안을 느낀 카스트로는 소련에 원조를 요청했고, 소련은 미국 플로리다가 바라보이는 해안에 핵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고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미국 정부는 소련에 미사일 기지를 철수할 것을 요구했지만, 소련은 쿠바에 설치하는 미사일이 미국의 침략을 막기 위한 방어용이라는 이유로 거절했으며 그러기 이전에 터키에 설치한 미국의 미사일 기지를 먼저 철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미국은 쿠바 해역 밖에서 미사일을 선적하고 쿠바로 오는 소련 함대를 봉쇄하게 된다. 소련 선박들이 미국은 설정한 해상 봉쇄선을 넘을 경우 소련과의 핵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협박이 흐루시초프 서기장에게 전달되자 양국은 고심 끝에 극적으로 타협했다. 소련이 미사일을 철수하는 대신 미국은 카스트로 정권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이로써 피델 카스트로 정권의 체제 안전 보장이 이루어졌으며 쿠바는 이후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연방이 들어섰음에도 변치 않는 친분을 유지했다. 이러한 와중에 미국 트럼프가 멕시코를 압박하여 쿠바로 가는 에너지 자원을 끊고 쿠바를 고립시켰다. 이후,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체포한 다음 핵심 공급처였던 베네수엘라로부터 에너지 공급을 중단시키면서 쿠바를 가자지구처럼 말려죽이려 하기 시작했다. 이후 쿠바에서는 광범위한 정전과 기본 서비스 중단 등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전통의 우방인 쿠바를 돕기 위해 73만 배럴의 디젤 연료를 적재한 러시아의 대형 유조선 '아나톨리 콜로도킨(Анатолий Колодкин)'과 '시호스(Seahorse)'가 쿠바를 향해 항행을 시작했다. 이 두 유조선은 쿠바에 3월 하순이나 4월 초에 도착 예정에 있다. 물론 이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쿠바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 계속 이루어질 것이라 언급했고, 쿠바는 러시아의 지원으로 인해 회생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