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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이란의 악연 : 이란인들이 러시아를 증오하는 이유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6 18:09:58

러시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를 정복하고 오스만투르크의 세력들을 남쪽으로 밀어냈다. 오스만 제국이 물러나면서 이란은 러시아 제국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이란 카자르 왕조의 시조인 아가 모하마드(Agha Mohammad) 칸은 다게스탄 국경 지대를 약탈하던 노가이인들과 칼미크인들을 격파했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에 붙어 저항하려던 조지아의 카르틀리-카헤티(Kartli-Kakheti) 왕국을 침공하여 포로 20,000여 명을 잡아 카프카스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면서 러시아 제국과 맞서겠다는 뜻을 천명했다. 이어 19세기에는 러시아 제국이 중앙아시아를 정복하면서 카자르 왕조는 러시아 제국과 가장 넒은 국경을 두고 마주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러시아와 이란 사이의 악연은 시작된다. 

Painting of the Battle of Ganja, made by Franz Roubaud in 1887, 출처 : Wikipedia, Russo-Persian War (1826–1828) 

러시아와 이란의 전쟁은 계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오늘날의 다게스탄 및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에 해당하던 지역은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넘어갔다.  당시 카자르 왕조의 저항은 생각보다 강렬했는데 아가 모하마드(Agha Mohammad) 칸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국과 동맹을 맺고 영국의 지원을 받아 제법 러시아의 남하를 잘 방어해냈다. 그러나 아가 모하마드 칸이 사망한 이후, 전쟁의 무게는 급격히 러시아 제국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의 후계 칸들이 모두 무능했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에 해당하던 지역, 쿠르디스탄 북부 지역이 러시아에 넘어가면서 미처 페르시아 내로 피신하지 못한 이란계 쿠르드족들이 그대로 남게 되었는데 이들을 타트(Таты)족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들 타트족들은 급격히 러시아화 되어 현재까지 중동 각 지역에 남아 있는 쿠르디스탄과 러시아, 이후 소련을 연결하는 중간 매개 역할을 하게 된다. 터키의 쿠르드족, PKK가 소련의 지원을 받게 되고, 공산주의 사상이 주입된 것도, 타트족이 다리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카자르 왕조의 이란은 러시아 제국에게 계속 패전을 거듭하며 19세기 중반에는 호라산 일대 영토 상당부분을 러시아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해당 지역에서 반농반목을 하던 쿠르드족들 또한 러시아 영내로 편입되었다. 그러자 카자르 왕조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한편, 어느 정도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러시아와 투르크멘차이(Turkmenchay) 조약을 맺게 된다. 이 조약으로 오늘날 카프카스 3국에 해당하는 지역은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현재도 러시아 연방공화국의 중동 진출을 위한 앞마당 역할을 하고 있다. 이로써 카프카스의 근대사, 경제 및 사회 문화 전반이 러시아와 소련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된 계기가 된다. 이렇게 되자 이란 내 남아 있는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이 러시아에도 망명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은 새로 정복한 카프카스 지역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 측과 내통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어를 적극 장려하고 아제르바이잔인을 중심으로 한 투르크 민족주의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물론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러시아 제국의 이 정책 때문에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이 살아 남을 수 있게 된 원인이 된다. 러시아가 아니었으면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의 문화와 언어, 민족 정체성을 보존시켜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제르바이잔어가 소멸되지 않고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었던 큰 이유는 러시아 제국이 적극 보호해줬기 때문이고, 오히려 해당 지역에 아제르바이잔어 보급을 장려했기 때문이다. 사실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에서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란에게 정복되어 자신들의 정체성조차 말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 세계를 두고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영국과 러시아 제국은 페르시아에서 가장 활발하게 외교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며 러시아와 영국 모두 페르시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당시 개혁적인 성향을 갖고 있던 아제리족 출신의 아미르 카비르(Amir Kabir) 재상이 집권하고 있었을 시기에는 이같이 러시아와 영국의 침탈은 노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카비르는 영국이나 러시아 모두 신뢰하지 않았으며 둘 사이에서 중립외교로 실리를 추구했다. 카비르는 러시아와 영국의 영향력을 최대한 억제하려 노력을 기울였으며 러시아 상인들이 아스트라바드(Astrabad) 지역에서 병원과 무역사무소를 운영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카스피해 남동쪽의 아슈라데(Ashurade) 섬을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던 러시아인들을 추방했다. 이는 영국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페르시아만을 통과하는 이란 선박에 대해 영국이 무조건 나포하여 취조하는 행위 등을 규탄하며 이를 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카비르는 미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이란과 큰 접점이 없었던 국가들과 우호 관계를 수립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카비르에 대해 앙심을 품던 영국과 러시아는 서로 일시적인 동맹을 맺고 공동의 적인 카비르를 몰아내면서 이란의 외교는 영국이냐, 러시아냐를 선택하는 길만이 남았다. 나스레딘 샤는 집권 초기인 1856년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를 공격해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파트 알리 샤(Fath-Ali Shah Qajar, 1772~1834) 시절에 러시아에게 함락당한 카프카스 지방을 탈환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헤라트를 점령하여 이란의 영토를 확장하고 이를 계기로 중국 청나라와 연결하여 영국-러시아와 대항해보고자 했다. '앵글로-페르시아 전쟁(Anglo-Persian Wars)'이 발발하면서 계속 페르시아가 밀리게 되자 러시아 제국에게도 사절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러시아 또한 이란의 헤라트 점령을 좋게 보지 않고 있었으며 러시아 제국은 나스레딘 샤에게 헤라트에서 철수를 요구했다. 러시아가 나스레딘 샤의 헤라트 점령을 좋지 않게 보았던 이유는 러시아가 장악한 중앙아시아와 동투르키스탄 일대의 영토를 넘보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도움도 얻지 못한 나스레딘 샤는 1857년 3월 4일에 마침내 파리에서 불평등 조약을 맺으며 굴욕을 당해야 했다. 카자르의 군대는 파리 조약으로 인해 헤라트에서 철군해야만 했고, 아프가니스탄 왕국을 인정하며 이 지역의 완충을 허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이란의 대(對)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영향력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이후 나스레딘 샤와 이란은 영국과 러시아에 의해 그 이권이 대부분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카자르 왕조는 러시아와 영국의 거대한 세력 다툼의 장인 그레이트 게임의 가장 대표적인 희생 국가들 중 하나였다. 러시아는 1828년에 체결된 투르크만차이 조약 이후, 조금씩 이란의 영토를 점령해갔다. 카자르 왕조가 거의 멸망할 수준까지 쇠퇴하게 되니 러시아는 그때서야 전략을 바꾸어 이란을 지원해주는 척 하며 이란의 왕실과 귀족들을 친러주의자로 만들어 그들을 조종해 각종 이득을 획득하는 수법을 쓰기 시작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영국령 인도 사이의 좋은 전략적 위치는 러시아의 눈독을 들이기에 충분했고 또한 많은 석유 매장량으로 관심이 많았다. 

특히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 남부 지역과 카스피해로 연결된 타바리스탄을 욕심내고 있었는데 이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이 쿠르드족으로 쿠르드족을 대대적으로 선동해 이란인들을 폭력적으로 제압하고 지역 석유 채굴권을 카자르 조정의 허가 없이 강탈해 석유를 뽑아 먹었다. 러시아는 이와 같은 내전 야기 및 조정의 친러 세력들을 이용하는 방법 등으로 거의 1세기 가까이 이란의 내정을 장악하며 이란 땅에 빨대를 꽂고 갖은 이익을 빨아 먹을 수 있었다. 러시아의 남하를 매우 신경질적으로 경계하던 영국은 이란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는데, 이란 궁정은 결국 러시아와 영국의 은행가들의 압박과 협박에 이권을 내줘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1879년에는 러시아 군 장교들이 이란 궁정에 무장을 하고 진입하여 이란 왕실의 궁녀들을 겁탈하고 환관들을 대놓고 살해했다. 1890년대에는 아예 러시아인들은 대놓고 궁에서 설치고 다니며 이란의 왕족과 귀족들을 마음대로 유린했다. 영국과 러시아는 19세기 내내 경쟁적으로 페르시아에 전신, 철도 등을 깔아주면서 각종 이권 침탈을 가속화했다. 

이와 같이 외세의 간섭이 심해지니 이란 시민들은 분노가 점차 쌓이게 되었고 카자르 왕조의 인기는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이같은 상황을 지켜본 영국인들은 영국 정부에게 보고하기를 영국이 철수하면 카자르 왕조는 러시아에게 정복되거나 시민 혁명으로 붕괴될 것이다며 보고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러시아 제국은 20세기 들어 이란에 대한 경제적인 수탈을 강화하였고,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세력권을 확대하는 등의 내정간섭을 벌이기도 했다. 이에 분노한 테헤란의 군중들은 반러 감정을 가지고 폭동을 일으켜 러시아 은행을 파괴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반러 감정은 이는 1908년 이란 입헌 혁명의 계기 중 하나였다.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이후 벌어진 적백내전 중에는 소련 적군의 도움으로 페르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Persian Socialist Soviet Republic)이 이란 북서부에 세워지게 된다. 그런데 이 페르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주축은 쿠르드족과 아제리인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이들 쿠르드족과 아제리인들을 통솔하던 인물이 장갈리스(Jangals) 가문의 미르자 쿠차크 칸(Mirza Kuchak Khan, 1880~1921)이었지만 그는 북서부 라슈트(Rasht) 출신으로 카자르 왕국의 사트라프(Satrap, 총독)이었다.

당시 북서부 아제리인이 중심이 되어 있는 장갈리스 가문 사이에서는 러시아의 볼셰비키가 러시아와 이란이 상호 공유하는 문제들, 상류층의 지배와 러시아 제국 황실 문제에 대해 진정한 해결책을 제공하고 있다며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쿠차크 칸의 2인자였던 에사놀라 칸 더스타(Ehsanollah Khan Doustdar)는 아제리인과 쿠르드족의 혼혈로써 이란에서 받은 페르시아인들에 대한 차별에 분노하고 있었는데 마침 볼셰비키즘의 영향으로 인해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쿠차크 칸은 시아파라는 종교적인 배경과 이란의 민족주의적인 배경으로 인해 불셰비키즘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망설이고 있었고, 다소 조심스러웠지만 이란 국내에 기반이 부족한 당시 배경을 생각한다면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며 장갈리스 가문은 즉각 볼셰비키와 협정을 맺게 된다. 이와 같은 러시아의 혁명가들과 협력으로 인해 쿠차크 칸의 지도 하에서 페르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언하고 공화국의 내정에 소련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등의 조건으로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 

1920년 5월에 신설된  페르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Persian Socialist Soviet Republic)은 페르시아 장갈리 운동으로 알려진 사회주의적 분배 형식을 따르기 보다는 급진적인 세력들이 페르시아인 중심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갑자기 국가 수입을 했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분배 형식인 가난한 농민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하지 않았다. 그러자 농민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쿠차크 칸과 그의 참모들 사이에서 에사놀라 칸을 중심으로 세력과 의견 충돌이 발생했고, 이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려는 러시아 볼셰비키에게 쿠차크 칸의 페르시아 공산당이 항의하면서 국제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악연들로 인해 이란은 현재까지도 러시아를 증오하는 이유가 되었다. 현재 이란은 러시아의 핵심 동맹으로 부상했으나, 러시아는 미국의 2차 제재를 의식해 S-400 같은 고급 방공 시스템 제공은 거부하는 등 복합적인 관계를 보였다. 지난 12일 전쟁도 그렇고 이번 전쟁 또한 러시아는 이란에 그다지 많은 도움을 주지 않았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마무리 짓는 것이 가장 급한 문제고, 이란-미국 전쟁에서 가만히 있어도 엄청난 이득을 챙기고 있는데 굳이 나설 이유도 없다. 미국과 이란 간의 전쟁 종식을 위한 조치들을 환영하지만 속으로는 더 오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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