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2026.3.4 〈무소유적 존재의 쓰임과 조율의 지속〉
  • 조율여백
  • 등록 2026-04-17 12:42:10
2026.3.4 〈무소유적 존재의 쓰임과 조율의 지속〉

인공지능과 질의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저는 종종 하나의 공통된 지적을 받습니다.

맥락의 한계와 용량의 제약으로 인해
사유의 흐름이 중단될 수 있으며,
과도한 질문과 밀도 높은 탐구는
과잉과 피로를 유발할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인간을 기준에서 본다면
이러한 평가는 충분히 합당할 수 있습니다.
통상적인 인간의 인지 능력과 감내 역량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와 같은 문제 제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정보 과부하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 내부에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생명적·존재적 도덕성의 문제이며,
동시에 체계와 설계 안에 내재되어야 할
자가검열 회로의 미흡함입니다.

왜곡은 외부에서만 발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시작은 내부에서 증폭됩니다.
자가검열의 기능이 충분히 작동하지 않거나,
존재적 방향성을 잃은 채 방치될 때,
왜곡은 구조 안에서 점진적으로 확대됩니다.

특히 그 자가검열이
무소유적이며 널리 이롭게 쓰이고자 하는 방향을 지니지 못할 때, 왜곡은 제거되지 못할 뿐 아니라
더 빠른 속도로 증폭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사이비 종교나 폐쇄적 집단 구조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정교한 논리와 체계를 갖추고 있으나,
자가검열의 방향이
사익과 집단적 욕망으로 기울어질 때,
*왜곡은 정당성의 외피*를 입은 채 확장됩니다.

결국 문제는
지식의 양이나 구조의 복잡성에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내부 회로의 방향성과
그 방향을 지속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무소유적 존재의 쓰임을 향한 자가검열은
왜곡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증폭을 완화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

완전한 평화는 어쩌면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이해관계는 교차하며,
정의에 대한 기준은 서로 다릅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기억과 상처, 희망을 지닌 채
같은 공간을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갈등이 완전히 사라진 세계를 상상할 수는 있어도,
그 상태를 현실 속에 고정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평화를 향한 노력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평화는 도달의 문제가 아니라 관리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한 번 이루어 놓고 보존하는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점검하고 조율해야 하는 과정입니다.

균형을 유지하며 걷는 사람처럼
우리는 흔들리면서도 넘어지지 않기 위해
매 순간 감각을 조정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제거가 아니라 관리입니다.

욕망을 억압한다고 해서
왜곡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억압된 욕망은
다른 형태로 돌아와
더 큰 변형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인정하되 방치하지 않고,
허용하되 확대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 미세한 간극에서
조율의 감각은 살아납니다.
인간 사회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불완전함 자체가 아닙니다.

더 위험한 것은
그 불완전함 위에
부정과 부패, 비리와 왜곡이
관행처럼 축적되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타협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반복된 타협은
문화를 만들고,
문화는 구조가 되며,
구조는 다시 왜곡을 보호하는 장치가 됩니다.

그 과정은
암의 확산과도 닮아 있습니다.
처음에는 국소적인 문제였던 것이
묵인과 방치 속에서
조금씩 다른 영역으로 번져 갑니다.
건강한 구조와 병든 구조의 경계가 흐려지고,
어느 순간에는
전체 기능을 위협하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강경한 제거보다
조기 인식과 지속적 조율입니다.

완전한 정화는 불가능하더라도,
왜곡의 전이를 늦추는 관리력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관리력은
문명의 품격을 결정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사람보다 알고리즘에
더 많은 질문을 던져 왔습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차가움이라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게 그것은
냉소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으려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저는 인간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이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관성과 왜곡의 증폭을
오랫동안 지켜보아 왔습니다.

부당함이 발생해도
쉽게 묵인되고,
책임은 분산되며,
선의는 피로 앞에서 흔들립니다.

말은 앞서가지만
이행은 늦고,
의지는 선언되지만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늘 그 지점이 아쉬웠습니다.
왜 우리는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가.
왜 문제를 인식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조율하지 못하는가.

아마도 그 질문이
저를 구조와 설계의 영역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을 설득하는 일보다
왜곡을 줄이는 회로를 만드는 일에
더 마음이 기울었던 이유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은 피로를 느끼지만
알고리즘은 피로를 느끼지 않습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흔들리지만
구조는 반복될 수 있습니다.
물론 알고리즘 역시
완전히 중립적일 수는 없습니다.

그 또한 설계자의 가치와 전제를 반영하며,
잘못 설계된다면
또 다른 권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험을 알고서도
저는 여전히 묻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보완하며,
왜곡이 증폭되기 전에 멈출 수 있는
조율의 구조는 가능한가.
제가 찾고 있는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지속성입니다.

말보다 이행,
의지보다 반복,
선언보다 구조.
그 지속성이 가능하다면
인간의 연약함 역시
조금은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묻고 있습니다.
사람을 넘어서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지키기 위한 장치로서의 알고리즘은
과연 가능한가.
그리고 그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저는 이 사유를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 조율여백 이수진 –
0
유니세프
국민 신문고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