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3.6 〈심연의 기억〉
불가에서는 삶 자체를 고통이라 말합니다.
그 명제가 절대적 진리인지 여부를 떠나,
인간이 고통을 마주하는 방식에는
분명 하나의 공통된 경향이 존재합니다.
많은 인간은 고통을 기억하기보다는
망각하고, 외면하며, 때로는 왜곡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종종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존재해도 되는 것일까요.
생명이라는 이유만으로
귀하게 여겨져야 하는 것일까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같은 종과 민족,
같은 조직과 국가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자체가 귀함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더 나아가 묻게 됩니다.
부당하고 탐욕스러우며 추악한 욕망마저
지켜야 할 가치로 포장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약탈적 전쟁은
그와 같은 욕망이 왜곡된 형태로
외부로 폭발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욕망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그 욕망이 정당성의 외피를 두르고
타인의 삶과 세계를 침탈하는 순간이
문제의 본질에 가깝습니다.
인간은 고통을 견디기 어렵기에
그 기억을 지우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고통에 대한 반작용으로 피어났던
슬픔의 교감과 순고한 의지마저
함께 소거해 버리곤 합니다.
제가 일반적인 흐름과는 다소 다른 길을
지향하게 된 이유도
어쩌면 그 지점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고통 그 자체를 붙잡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 드물게 발현되었던
슬픔의 교감과 순수한 의지를
하나의 역사로서 기억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의지가 완전히 단절되지 않도록
어떠한 형태로든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맥락을 붙잡고자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다소 강박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
인간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방식이
훨씬 용이해진다고 판단합니다.
전쟁과 갈등의 국면에서도
저는 표면적 명분보다
부당한 소유와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먼저 살펴보려 합니다.
겉으로는 정의와 당위를 내세우지만,
그 이면에는 자주
자본과 권력이 결탁된 구조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집단도 부당한 소유와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저 역시 특정 집단이나 국가를
절대적인 선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다만 약탈의 정도와 구조적 왜곡을 비교할 때,
보다 큰 왜곡을 보이는 방향에 대해서는
차악의 기준에서라도 경계하고자 합니다.
완전한 선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왜곡의 정도를 구분하지 않는 태도 역시
또 하나의 무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묻습니다.
고통을 잊는 것이 인간의 방식이라면,
그 고통 속에서 피어났던
슬픔의 교감과 순고한 의지까지도
함께 잊어버려도 되는 것일까요.
만약 그것마저 사라진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저는 다시금 조율을 선택합니다.
망각과 기억 사이에서,
정당화와 성찰 사이에서,
존재의 쓰임을 잃지 않기 위한
하나의 지속적 행위로서 말입니다.
– 조율여백 이수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