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3.10 〈존재의 의미와 목적이라는 방향성〉
최근의 국내외 정세를 바라보며,
저는 다시 한 번 근본적인 사유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국내에서는 이른바 검찰개혁을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고 있으며, 국외에서는 전쟁과 그 정당성을 둘러싼 다양한 주장과 왜곡된 서사가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흐름을 마주하며,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하게 됩니다.
인간과 문명은 과연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가.
우선 분명히 전제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세계뿐만 아니라
더 넓은 의미에서의 우주와 존재의 영역 역시
완전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는 정지하지 않고,
끊임없이 운동하며 순환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환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목적과 방향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하나의 중심 궤도를 유지하려 노력하게 됩니다.
미물적 존재로서의 인간 역시
이와 같은 구조 안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하기에 흔들리고,
오류를 경험하며,
그 과정 속에서 변화와 가능성을 획득합니다.
만약 완전한 존재였다면
변화도, 배움도, 성찰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불완전성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의 조건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는
오랜 시간 반복되어 온 하나의 왜곡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완벽’이라는 개념의 남용입니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 이념이
스스로를 완전한 존재로 규정하는 순간,
그 주장 속에는 이미
왜곡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완벽을 표방하는 담론은 종종
권력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기능해 왔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저해하며,
다양한 경험과 사례를
정합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를 약화시킵니다.
역사에는 감사해야 할 성취와 더불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실패가 공존합니다.
그러나 완벽을 전제하는 사고는
이러한 이중적 구조를 수용하지 못하고,
결국 현실을 단순화하거나 왜곡하게 됩니다.
또한 순환과 조화, 피드백이라는
기본적인 구조 원리 역시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워집니다.
결국 ‘완벽’이라는 개념은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부당한 소유와 권력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기제로 변질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인간에게 요구되는 방향은
지배나 독점이 아니라
‘널리 이롭게 하는 방향성’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무소유적 태도와도 일정 부분 맞닿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소유는
물질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내는 왜곡을 경계하며
존재의 의미를 우선에 두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방향은
때로는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중심이 되는 의미와 목적을 유지하는 것이
보다 본질적인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방향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객관화, 정합화, 구조화, 그리고 의미화의 과정입니다.
자신과 세계를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
역사와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정합적으로 정리하는 태도,
이를 하나의 구조 속에서 이해하려는 사고,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재확인하려는 성찰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투명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우리가 지향하는 방향성과
서로 충돌하지 않아야 합니다.
결국 인간과 문명이 지향해야 할 것은
완벽이라는 상태가 아니라,
불완전함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으려는 지속적 노력일 것입니다.
조율여백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조정되고 유지되어야 하는 과정입니다.
완결을 선언하는 순간 조율은 멈추고,
조율이 멈추는 순간 왜곡은 시작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완벽을 주장하는 태도가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로서 지속적으로 성찰하고
조율을 이어가는 자세입니다.
그러한 지속적 조율의 과정이야말로
인간과 문명이 유지해야 할
하나의 중심 궤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조율여백, 이수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