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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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예술가가 아닌 일반대중들도 살바도르 달리나 르네 마그리트의 이상한(?) 작품은 한 두점쯤은 보았을것이다.
1920 년대 발현한 초현실주의 당시 시대상은1차 세계대전이후 전쟁의 상흔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다. 대중들은 과학 기술이라는 이성 합리주의가 전쟁무기를 만들어 인간을 대량학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 지성집단사이에서도 합리주의 진보주의에대한 환멸이 짙게 깔려 있었다. 비참한 현실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의식 너머 무의식의 세상 .
> 초현실주의: 무의식과 상상력의 해방
초현실주의자들은 상상력의 힘을 깨우기 위한 수단으로 무의식을 탐구하고자 했다.
이성주의와 문학적 리얼리즘을 경멸하고 정신분석학의 강한 영향을 받은 그들은, 이성적인 마음이 금기(taboo)를 통해 상상력의 힘을 억압하고 짓누른다고 믿었다.
무의식 세계를 두드리고 신화와 원시주의에 관심을 가졌던 초현실주의적 충동은 이후 많은 예술 운동을 형성했으며, 그 스타일은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 기원과 영향
초현실주의는 중산층의 안일함에 반기를 들었던 다다(Dada) 운동에서 파생되었다.
초현실주의자들에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준 인물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로, 그는 기이한 이미지와 기괴한 병치를 사용했다. 또한 그들은 나이브 아트(naive art)나 환상적인 이미지에 관심을 가졌던 원시주의(Primitivism) 및 상징주의(Symbolism) 예술가들(귀스타브 모로, 아놀드 뵈클린, 오딜롱 르동, 앙리 루소 등)에게 매료되었다.
심지어 선과 색이라는 미학적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초현실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실재(real)'를 창조하는 데 몰두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주세페 아르침볼도나 히에로니무스 보스 같은 예술가들에게서도 영감을 얻었다.
> 운동의 시작
초현실주의는 원래 다다와 밀접하게 연관된 문학 집단으로 시작되었다. 파리에서 다다가 붕괴된 후, 다다에 목적의식을 부여하려던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과 트리스탄 차라의 반권위주의가 충돌하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했습니다. 초현실주의의 '교황'이라 불리기도 하는 브르통은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을 쓰며 이 운동을 공식적으로 창립했다. 하지만 '초현실주의(surrealism)'라는 용어 자체는 1917년 기욤 아폴리네르가 피카소, 레오니드 마신, 장 콕토, 에릭 사티가 제작한 발레 <퍼레이드(Parade)>의 프로그램 노트를 작성할 때 처음으로 만들어낸 단어이다. 브르통이 첫 선언문을 발표할 무렵, 이 집단은 잡지 <초현실주의 혁명(La Révolution surréaliste)>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주로 글에 집중했지만 데 키리코, 맥스 에른스트, 앙드레 마송, 만 레이 등의 작품 복제본도 포함되었다.
1924년 파리에는 초현실주의 연구소(Bureau for Surrealist Research)도 설립되었다. 이곳은 "정신의 무의식적 활동을 표현할 수 있는 형태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모인 작가와 예술가들의 느슨한 연합체였다. 브르통이 이끄는 이 연구소는 꿈의 이미지를 수집하는 아카이브와 사회생활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아카이브를 동시에 운영했다.

> 예술적 접근과 확장
초현실주의는 다다의 반이성주의를 공유했다. 초기 파리의 초현실주의자들은 폭력적인 정치 상황으로부터의 도피처로, 그리고 세상의 불확실성에 대해 느끼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예술을 이용했다. 예술가들은 판타지와 꿈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다양한 매체로 작품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내면의 마음을 기이하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노출하며 불안을 드러내고 시각적 수단을 통해 분석적으로 다루었다.
초현실주의는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지만 전 세계 예술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특히 1930년대와 40년대에 정치적 격변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인류 문명이 위기와 붕괴 상태에 있다는 공포가 커지면서 많은 예술가가 이 운동에 합류했다. 전쟁 중 많은 초현실주의자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망명하면서 그들의 사상은 더욱 널리 퍼졌다. 그러나 전후에는 개인주의를 찬양하면서도 초현실주의보다 더 이성적인 기반을 둔 실존주의(Existentialism)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미술계에서는 추상표현주의자(Abstract Expressionists)들이 초현실주의의 아이디어를 흡수하고 무의식을 표현하는 새로운 기법들을 개척하며 주도권을 가져갔다. 브르통은 운동의 일차적 목표로서 혁명적 정치 활동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원래의 운동은 작은 분파들로 흩어졌습니다. 로베르토 마타 같은 '브르통파'는 예술이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라고 믿었습니다. 반면 이브 탕기, 맥스 에른스트, 도로시아 태닝 등은 브르통과 결별하고 미국에 남았습니다. 살바도르 달리 역시 예술에서 개인의 중심성을 믿으며 스페인으로 물러났다.
> 쇠퇴
초현실주의는 “한 번에 끝”난 건 아니고, 1930~40년대를 정점으로 힘이 빠지고, 이후에는 양식/어법으로 흡수·분산되며 지속됐다고 보는게 오히려 정확하다. 여러갈래의 원인들이 이야기되는데 이를 분야별로 정리하면
1) 역사·정치 환경 변화
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 전위 네트워크가 붕괴/이주(파리 중심 체계 약화).브르통 중심의 운동은 강하게 정치적 선언과 연결됐는데, 전후 냉전 구도 속에서 전위가 취할 수 있는 정치적 위치가 복잡해지며 내부 갈등.
2) “운동”이 제도권에 편입되면서 전위성이 약화
초기엔 스캔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미술시장·미술관·출판이 초현실주의를 ‘전시 가능한 스타일’로 포장.전위의 힘은 “금지/충격”에서 오는데, 제도화되면 충격은 익숙한 이미지 문법
3) 내부의 분열과 교리화(브르통의 권위 문제)
브르통의 강한 리더십은 장점이었지만, 동시에 제명·파벌·정통성 논쟁을 낳아 운동을 소모시켰다.“초현실이란 무엇인가”가 실험보다 정의 투쟁이 되는 순간, 생명력이 떨어진다.
4) 자동기술(automatism)과 무의식 전략의 한계가 드러남
자동기술은 초기엔 혁신이었지만, 반복될수록 기법화(패턴화)되기 쉽다.무의식·꿈 이미지가 강력해질수록, 반대로 관객은 “아, 또 그 장치”라고 학습하며 예측 가능성이 생긴다.
5) 미술의 주도권 이동: ‘파리 → 뉴욕’과 새로운 헤게모니
전후 미술의 중심이 이동하면서, 국제 담론의 중심축이 추상표현주의/포멀리즘으로 기울어짐.초현실주의가 약한 게 아니라, 시대의 “주류 질문”이 재현/상징에서 행위/물질/평면성으로 이동한 것임.
6) 더 급진적인 후속 실험들이 등장
다다의 후예적 계열, 상황주의, 플럭서스, 개념미술 등은 “이미지”보다 “규칙/행위/제도 비판”을 전면에 두며 전위 경쟁에서 새로운 표준이 된다. 즉 초현실주의의 전복 방식(꿈/상징/욕망)이 당대 최전선의 무기가 아니게 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