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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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이 관행으로 자리를 잡아 성행했던 명(明)나라 조정에서도 깨끗함을 유지한 사람 하나가 있다. 지방 벼슬아치였던 그가 수도를 잠시 방문하자 높은 사람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는 친구의 권고를 받았다. 그러자 그는 “상관에게 바칠 뇌물은 없고 두 소매에는 깨끗한 바람 뿐”이라고 했다. 명나라를 구한 영웅 우겸(于謙)은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 그로 인해 ‘두 소매에는 깨끗한 바람 뿐’이라는 뜻의 양수청풍(兩袖淸風)이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졌다.

중국 북경성 성곽 및 성문,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가져도 좋고, 가지지 않아도 좋을 때, 가진다면 청렴함을 떨어뜨린다(可以取, 可以無取, 取傷廉). 줘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을 때, 준다면 은혜의 깊이가 떨어진다(可以與, 可以無與, 與傷惠). 죽어도 좋고, 죽지 않아도 좋을 때, 죽는다면 용기의 진정성을 손상한다(可以死, 可以無死, 死傷勇).”
1449년 오이라트가 침략로 영종 정통제가 오이라트에 의해 포로가 되자 오이라트 측이 제시한 무리한 협상이 있을 것으로 예견되는 상태였다. 이에 병부시랑 우겸은 북경성의 수비를 강화하고 황제의 이복동생인 주기옥을 새로운 황제로 등극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는 우겸이 북경을 오이라트에 넘겨 줄 수 없는 강인한 의지도 있었지만 오이라트에게 국가의 자주성을 지키고 약점을 보이지 않겠다는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고육책은 오이라트의 침공에서 나라를 구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그러면서 그러한 고육지책은 포로가 된 영종도 살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종이 포로로 잡혀간 지 20여일 후인 1449년 9월 22일에 주기옥은 즉위하여 연호도 경태(景泰)로 개원하였다. 그리고 우겸은 방금 포스팅 한 것과 같이 북경대회전을 승리로 이끈다. 이에 에센이 토목보에서 포로로 잡은 영종을 앞세워 협상을 진행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황제를 옹립한 상황에서 영종의 존재는 극히 미약할 수밖에 없다.
에센은 화가 나서 영종을 죽이려고 했지만 황제로써 능력이 변변치 않은 그를 죽여 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차라리 영종을 명나라로 보내 혼란을 일으키고 설사 그가 황제로 복위한다 할지라도 그를 이용할 수 있으니 차라리 영종을 살려보내는 것이 오이라트에게는 득이 될 것이라 에센이 판단한 것 같다. 결국 에센은 아무런 조건 없이 영종을 명나라 조정에 송환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영종이 돌아오자 경태제와 병부의 우겸을 비롯한 조정 중신들은 영종을 상황(上皇)으로 올렸지만 반역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남궁에 유폐하였다. 그러나 조정은 돌아온 영종 중심으로 하는 파와 경태제를 중심으로 하는 파로 나뉘게 되고 이들의 파벌 싸움이 심각해졌다. 이에 경태제는 본래 태자였던 정통제의 아들 주견심(朱見深, 훗날의 성화제成化帝)을 폐하고, 자신의 아들인 주견제를 태자로 책봉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 견제는 병으로 사망했다.
1457년 경태제 또한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병에 눕게 되자 영종 중심으로 하는 파인 석형, 서유정, 조길상 등은 영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들은 연금 상태에 있던 영종을 자주 만나게 되고 자신들의 사병을 일반 백성으로 변장시켜 성 안에 끌어들인 다음 오이라트가 재침한다는 허위 정보를 흘려 자금성의 각 성문을 걸어 잠궜다. 그리고 이어 피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당시에 경태제를 황제로 세웠던 왕문, 태감왕성등은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고 우겸은 잡혀 영종 앞에 끌려와 심문을 받았다.
자신을 구하려 하지 않고 동생을 황제로 세운 우겸에 대한 괘씸죄는 단지 우겸 하나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우겸의 집안 사람들과 형제, 친척, 친구에 이르기까지 9족을 멸했고 그러한 고육지책을 통해 국가도 살리고 영종도 살리는 계책을 세워 명나라를 구한 충신 우겸은 속이 좁은 영종에게 참형을 당하게 된다. 이로써 영종은 복위 성공했고 경태제는 폐위되었다. 영종은 이 때 연호를 천순(天順)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경태제 전에는 정통(正統)이라 하였고 쿠데타 이후에는 천순(天順)이라 하였기 때문에 명나라 역사상 한 황제 시대에 연호를 두 개 사용한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한편 경태제는 폐위된 지 한 달 후에 급사하였고 이에 대한 사망 원인에 대하여 영종이 독살했다는 독살설이 재기되기도 하였다.이러한 혼란한 상황, 우리에게도 아쉬운 순간이었다. 1449년이라면 우리 조선의 성군이 세종대왕이 계셨을 때다. 그리고 문종, 단종의 시대가 있었던 상황에서 군사를 내어 오이라트와 동맹해 명나라를 협공했다면 우리는 만주를 수복하고 고조선의 옛 영토를 찾았을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사대모화사상, 소중화에 빠진 조선은 명나라를 군부의 나라로 섬겼기 때문에 이러한 좋은 기회를 놓쳤다.
물론 조선도 수양대군이 일으킨 혼란의 상황에 놓인 조정이라는 것을 보면 다소 어렵다고 할 수 있었겠지만 병약한 왕들에 비해 전권을 쥐고 있던 수양대군이 이러한 웅지를 가지고 큰 일을 했다면 그는 후대에 의해 역사에서 좋은 이미지로 서술되었을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