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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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 민족 문화 안의 베두인과 현대 중동 세계에서의 역할
이슬람 발생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에는 베두인(Bedouin : 사막의 유목민)과 오아시스의 정착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둘 다 부족 단위로 공동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부족에는 부족장(shaykh 또는 sayyid), 신관(神官, Kāhin), 전시 군사 지도자(Qā’ìd) 및 중재자(Ḥakam) 등의 요직이 있었으며, 이들은 부족 구성원 총회(Majlis)에서 선임되었다. 부족장은 특별한 권한을 누렸다기보다 동등한 구성원 가운데 제1인자의 역할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고, 다른 부족과의 교섭에서 부족을 대표하는 정도였다. 그는 덕망이 높고 나이가 많은 구성원 중에서 주로 선출되었다. 신관은 부족의 제사와 축제 및 장례 등의 의식을 관장하였으며, 전시 군사 지도자로는 다른 부족과의 전쟁, 천재지변 등 위기 시에는 연로한 부족장보다는 군사적 식견과 활동력이 좋은 중년의 구성원이 더 적격으로 여겨져 선임되었다. 중재자는 부족 구성원 간의 분규를 조정하여 해결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부족 구성원 총회에서 토의하여 최종 결정하였다.

아랍에미리트의 광활한 두바이 사막에서 즐길 수 있는 낙타 사파리 투어 장면, 흰색 칸두라를 입은 현지 가이드는 베두인 유목민이다. 출처 : Klook Travel
물론 이러한 결정에는 관행(Sunnah)이 중요시되었다. 베두인은 넓은 사막을 배회하면서 초원을 찾아 방목하여 생활을 꾸려 나갔으나, 도시의 정착민은 농경 생활을 영위하거나 상업 활동을 통하여 생계를 이어나갔다. 오아시스 도시 가운데에는 메카와 메디나, 당시는 야스리브(Yathrib)가 가장 두드러졌다. 메카는 예멘과 시리아, 이라크와 에티오피아를 이어주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여 상업 도시로서 유명하였다. 또한 이 도시는 토질이 척박하여 주민인 쿠라이쉬(Quraysh) 부족은 주로 상업, 무역에 종사하여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 도시의 중심에는 카바(Ka‘bāh : 후에 이슬람의 기도 방향이 됨)라는 성역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쿠라이쉬 족의 신상(神像) 뿐만 아니라 주변에 살고 있는 수많은 아라비아 부족의 신상도 있었기 때문에 메카는 종교 중심지 역할도 하고 있었다. 이에 메카는 예멘에서 실어 온 향료를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및 이집트 등 각처에 공급하였고, 보다 개화한 지역의 문물을 가져와 아라비아 반도에 보급한 문명의 중개지였다.
반면에 메카 북방 약 300㎞에 위치한 메디나는 단순히 농업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쿠라이쉬 부족은 교역 활동을 통하여 협동력, 조직력 및 자제력을 함양하였으며, 베두인의 용맹성과 결합하여 후에 이슬람 제국이 창건하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베두인은 여러 부족으로 분류되어 있고, 사막의 이곳저곳에 있는 초원을 찾아다니며 유목 생활을 한다. 현대화와 더불어 그들의 수는 줄어들고 있지만, 아직도 아라비아 인의 3~5%는 이 베두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유목 생활을 그만두고 농촌에 정주하고 있는 아라비아 인들도 부족 단위로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도 상당히 많다. 도시에 정주하고 있는 아라비아 인도 자기들의 조상이 베두인이었다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으며, 베두인의 아라비아어가 가장 순수한 아라비아어로 믿고 있다. 오늘날에도 아라비아인들이 즐겨 다니는 시 낭독 회에서는 베두인 시인들이 지은 부족의 영광을 노래한 시를 신명나게 읊고 있거나, 베두인 부족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이 많다.
부족 생활은 부족의 모든 구성원이 한 조상으로부터 나온 자손이기 때문에 혈연관계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더구나 이들은 이 친족 관계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들의 동료 부족 구성원에 대한 애착심이 강하다. 필요한 경우에는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자기 부족의 편을 들어 도와준다. 이를 두고 14세기 튀니지 출신의 정치 사상가인 이븐 할둔(Ibn Khaldūn, 1333~1406)은 아사비야(‘Aṣabīyah)라는 이름으로 맹목적인 연대 의식을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원시적인 혈연적 부족 개념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도시에 정주하고 있는 아라비아 사회 각층에도 큰 세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와 같은 좋은 일례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Kingdom of Saudi Arabia)과 하심 요르단 왕국(Hashimite Kingdom of Jordan) 등의 국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두 왕국은 각각 사우드 부족과 하심 부족의 소유라는 것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은 국가 원수로서의 기능 가운데 부족장 중의 부족장(Shaykh of Shaykhs)이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아라비아 국가, 쿠웨이트, 바레인, 오만 및 아랍에미리트(UAE) 등도 지배자들의 친족과 인척들만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외에도 모든 아라비아 국가의 사회 각층에도 혈연에 대한 애착 때문에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제공하는 일은 상당히 많다. 아라비아인들은 친족 결혼이 성행하고 있으므로 혈연 의식이 강하여 사촌 간에 결혼을 하는 경우에 부부 사이에도 사촌 오빠(Ibn ‘Ammī : 삼촌의 아들이라는 뜻) 또는 사촌 여동생(Bint Ammī : 삼촌의 딸이라는 뜻)이라 호칭하고 있다. 또한 이 두 어구(語句)는 남편 또는 아내라는 뜻으로 각각 사전에 풀이될 정도이다. 이와 같이 혈연을 신성시하고 혈연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은 그들의 생활과 사고에 크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계(家系)에 대한 지식과 자부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가계에 대한 비방은 용서할 수 없는 최대의 모욕으로 여기고 있다. 어떤 한 집단 구성원이 다른 집단 구성원에 의해 피해를 보게 되면, 피해 집단은 가해 집단에게 반드시 복수할 의무를 지게 된다. 이 경우에 가해자를 찾을 필요는 없고, 가해 집단에 속해 있는 구성원이면 누구에게나 입은 상처처럼 같은 상처를 입힘으로 인해 복수를 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집단은 부족, 씨족 및 가족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혈연적 단결심은 도시에 정주하는 아라비아인 사이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는 동일한 혈연 사이에는 협조가 잘 되며, 이 현상은 간혹 정부 부처 의 장과 그의 부하 직원 사이에도 보인다. 그러나 다른 혈연과의 경우에는 체면과 조심성을 앞세워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혈연이 상이하면 합심하여 끈기 있게 목적을 추구하는 협동(Team Work) 정신이 부족하다. 이러한 혈연에 의한 파당성은 공평을 기본으로 삼아야 할 인사 행정이나 다른 사무 처리에 있어서 부작용을 일으켜 비리의 온상이 된다. 이슬람교는 알라 앞에서 만민 평등을 교시하고 있고, 부족 구성원 사이에도 평등 의식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부족 간의 평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부족수에 있어서나 군사력에 있어서 막강한 부족은 타 부족을 지배하였다. 부족 가운데 우열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족의 형태가 붕괴되고 있는 오늘날의 아라비아 사회에서는 개인과 개인의 접촉에는 노골적인 인간 차별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특히, 전통적인 부족 구성원 간의 평등 의식과 이슬람의 평등사상으로 인해 아라비아인은 상호 간 대화와 접촉의 자유는 적어도 공적으로는 보장되어 있는 것 같다.
오늘날 아라비아 국가의 국체와 정체가 군주국이거나 공화국이든, 혹은 전제 정치를 시행하든 간에 형식적으로는 의회 민주 정치를 하는 것과도 관계없이 사회의 밑바닥에는 대화와 의사소통의 자유가 있어 개인은 누구나 필요한 인물을 찾아가 어느 정도 자기의 입장을 방어할 수 있는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부하 직원이 그의 상관에게 접촉과 의사소통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평등은 아니다. 평민의 자녀가 고관의 자녀와 혼인을 하는 일례는 아라비아인들에게는 극히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사실은 차(茶)나 우편물을 나르는 하급 공무원이나 평민, 심지어 걸인도 자유로이 관청을 드나들면서 하급 기관장은 물론 국가 원수에 이르기까지 지정된 면담 시간에 방문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가 마련되어 있는 사실에서 파악할 수 있다. 아라비아인들은 저자세나 필요 없는 아첨은 비굴한 행동으로 여겨 경멸하기 때문에 대체로 상관을 대할 때에도 당당하게 행동한다.
일반적으로 모든 기관장은 매주 1회에 2~3시간가량 면담 시간을 책정하여 방문객이나 부하 직원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있다. 복잡한 현대의 산업 사회에서 이와 같은 시간 소모는 다소 행정력의 약화를 초래한다고 볼 수 있으나, 사회의 최 하부 계층이라도 자기는 공평하게 대우를 받고 있으며, 또한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을 때에는 언제라도 하소연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혈연 의식 및 대화와 접촉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혈연적인 관계와 자기의 생활 주변을 벗어나서는 어떠한 도덕과 규율의 굴레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들에게는 공중도덕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라비아인은 혈연적인 인척과 가까운 친구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것을 객체(客體), 남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공공 의식의 결여는 그들의 정부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대부분의 아라비아인은 정부의 존재 자체를 공공의 복지나 국민의 생활 개선을 위해 봉사를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징세와 징병을 강행하기 위한 일종의 권력 단체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공중도덕의 결여로 인해 현대 산업 사회에서 필요 불가결한 조건인 교통질서, 직장 내의 위생 질서, 약속 시간 개념 등에는 무관심한 것이 그들의 일반적인 행동 양식이다. 이는 국가와 같은 공공 집단이 다른 소집단보다 우선한다는 원칙은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정당은 주로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상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결성하는 것이 아니라, 동족적 또는 종교적 파벌을 기초로 하여 조직된다. 이 현상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아라비아 국가 중에서 가장 잘 모방하고 있다고 평가되는 레바논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많은 아라비아 국가에서는 이러한 병폐로 인해 아예 일국 일당 체제나 전제 왕정(專制王政)이 지배적인 정치 체제로 등장하고 있다. 혈연 공동체의 극소 단위로서의 가족은 혈연 의식의 특징을 지금까지 가장 잘 보존하고 있으며, 그 산실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아라비아인은 부족적인 집단생활에서 벗어나 가족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이는 개인에게 가장 의미 있는 생활 단위는 부족이 아니고 가족이다. 물론 왕족이나 영주 등과 같은 명문 귀족들에게는 부족이나 씨족 개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평민은 가족 중심의 생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평민들의 가족 개념은 아직도 부모와 자녀를 중심으로 하는 핵가족이 아니고 대가족 제도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가족 제도는 합동 가족의 형태이다. 이것은 부계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다. 양친과 자녀 및 조부모, 숙모, 숙부 또는 방계의 친족 및 조상의 친척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가까운 친구들까지 포함되는 방대한 조직인 것이다. 아라비아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보다 가족의 출신 성분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곧 개인의 사회적 지위는 한 가족이 점유하고 있는 사회적 위상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은 상류층에 속할수록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개인과 가족 사이는 어떤 경계선을 뚜렷이 그을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밀착되어 있다.
개인으로서의 아라비아인은 자기 자신에게 의존하고, 스스로 생각하며, 자기의 길을 스스로 택하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독자적 삶을 개척하기에는 가족 관계가 아직 매우 강하다는 뜻을 의미한다. 가족 구성원 간의 밀착성은 그들의 호명법(呼名法)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개인은 결혼하기 전에는 주로 아무개의 아들, 딸 등으로 불리며, 결혼 후 자녀를 가지게 되면 아무개의 아버지, 어머니 등으로 불린다. 이 호명법은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를 그대로 나타내어 주로 남성의 이름을 위주로 하여 호칭되고 있다. 이 현상은 단순히 호칭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을 어떤 지위에 천거하거나, 제3자에게 소개할 경우에도 사용한다. 또, 한 개인이 출중하여 상당한 지위에 오르면, 주로 부족명이나 출신 지역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