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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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왕조는 크게 3개의 시대로 구분된다. 1기는 표트르 대제가 등장하기 전까지로, 미하일과 알렉시스의 통치하에 전제권력을 재건하고 왕조의 기반을 다진 시기다. 이 시기에는 모스크바 러시아 시대의 사회구조가 거의 변화하지 않은 채 그대로 이어졌다. 2기는 표트르 대제에서부터 알렉산드르 1세 때까지이다. 이 시기에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추진과 더불어 러시아를 근대 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해 다량으로 노력하던 시기이다. 물론 이 시기에는 슬라브와 기타 투르크계에서부터 이어온 아시아 특유의 전통을 버려야했다. 서구 유럽의 문물과 군사 기술, 그리고 당시 존재했던 프랑스의 절대 왕정에 따른 전제 정치의 통치를 받아들이며 시민과 농노를 최악으로 혹사시켰다. 따라서 이 시기는 러시아가 근대화하여 발전을 이룩하는 기초를 마련하는 시기이면서 가장 절대적인 비판을 피할 수 없었던 시기였다. 3기는 알렉산드르 2세부터 로마노프 왕정이 멸망하는 니콜라이 2세 때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해방령을 발표하면서 시민들과 농노들의 권익이 조금씩 보호되기 시작했고 이전에 극단적인 학대를 받았던 민중과 노동자들의 권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던 시기이다.

로마노프 가문의 적장자, 미하일 로마노프의 즉위식,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결국 이러한 민중들의 목소리와 투쟁은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을 불러왔고 결국 로마노프 왕정이 무너지고 소비에트 체제로 전환되는 계기를 맞는다. 로마노프의 시대적 구분은 러시아가 현재의 형태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혹독한 시련의 시기를 겪어야 했다. 이렇게 현재의 러시아로 변화되는 과정의 1기 시작은 미하일의 즉위 때부터였다. 미하일이 제위에 오른 이후 약 10년 동안 왕조의 기반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젬스키 소보르는 해마다 열렸다. 그러나 왕조 초기의 문제가 어느 정도 가라앉게 되자 차르는 젬스키 소보르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1670년대 이후에는 거의 소집하지 않았다. 일정한 선출 방식이 마련된 예도 전혀 없었고, 소집될 때마다 구성원의 사회적 성격도 달라졌다. 귀족이나 향신(鄕紳)도 관료 기구로의 충원을 더 희망했고 대의적인 기구의 발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전제정(專制政)으로 치닫게 되는데, 만일 로마노프 왕조의 초기 지도자들이 젬스키 소보르를 발전시켜 나가고, 로마노프 왕조 탄생의 기초였던 시민과의 협력을 중시했더라면 러시아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면 러시아 전제정치의 상징이자 핵심인 차르가 어떠한 존재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전제정치의 상징적 존재인 차르에 대하여 우선 2대 차르의 명칭 전체를 예시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대 러시아, 소 러시아와 백러시아의 대군주 황제 및 대공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전제자(Великий господин, царь и великий князь Алексей Михайлович, всея Великая, Малая и Белая Россия, Cамодержец)”라는 긴 명칭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용어는 “전제자(Cамодержец)”이다. 이러한 전제자의 의미는 국가의 원수로 3권을 장악하며,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을 겸함으로써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제약 받지 않는 절대 군주의 지위를 말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한 절대적인 군주의 상징성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헌법과 제도화된 내각, 선출된 입법부와 정당도 존재하지 않았다. 절대자로서의 차르는 반신반인적(半神半人的) 존재였던 것 같다. 이러한 이유는 “세상은 오직 하느님과 차르만이 아신다(Только Бог да царь знают).”, “하늘에서는 하나 뿐인 태양이 빛나고, 땅에서는 러시아의 차르가 빛난다(На небе солнце, на земле царь).” 라든지 또한 “하느님과 차르를 통해 러시아는 강하다(С Богом и царём Россия сильна).”, “하느님에게 가는 길은 매우 높다. 그리고 차르에게 가는 길은 매우 멀다(До Бога высоко, до царя далеко).” 와 “하늘은 높다. 그러나 차르는 더 높고 멀다(Небо высоко, а царь ещё выше и дальше).” 등의 러시아 속담에 잘 드러나 있다.
한편, 차르 체제의 러시아는 경제적으로는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사회였다. 당시 차르가 지배하는 기간인 19세기 중반까지 농노제 또는 부역 경제가 지배적이었다. 1840~1860년대에 가서야 비로소 기계를 중심으로 한 대공업이 도입되었으나, 그래도 농노제적 대 귀족, 곧 대 지주가 정치력과 경제력을 장악했고, 자본제와 봉건제가 엇갈린 채 반 이상의 봉건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 전체를 개혁하기에는 차르를 중심으로 한 정치와 신분제가 존재한 사회는 너무 취약했다. 이러한 개혁의 전제 체제가 반드시 강력한 정부로 여겨졌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농민 반란과 반(反) 체제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나면서 점차 러시아 혁명의 분기점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로마노프 왕조는 17세기 말에 표트르 대제가 등장하면서 전체 러시아 사회에 있어 크게 변화되기 시작한다. 표트르 대제의 광범위한 개혁이 행해져, 러시아는 구태를 쇄신하고 유럽 열강의 하나로 부상했다. 그리고 얼마간의 혼란기를 거쳐 18세기 후반에는 걸출한 여제인 예카테리나 2세(Екатерина II)가 등장하여 러시아의 위상을 다시 드높이기 시작했다.
이는 러시아의 동쪽으로의 영토 확장과 더불어 시베리아를 정복한 일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여전히 모든 면에서 후진적인 모습을 탈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예로 들어 서유럽의 여러 나라가 봉건제도로부터 벗어나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시민의 자유를 신장시켜가고 있던 당시 러시아에서는 농노제와 전제권력이 더 강화되어 가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2세의 사후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러시아에서도 두 번째 변화가 시작된다. 이 시기에는 제위 계승의 원칙이 확립되어 황제 자리를 둘러싼 내부 정쟁은 없어지나, 러시아의 후진성이 명백하게 드러나면서 개혁과 반동이 급격하게 교차하고 지식인과 인민들 간에 개혁과 혁명을 요구하는 운동들이 발생했다. 이어 20세기로 넘어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로마노프 왕조는 종식되었다. 당시 어린 나이로 즉위한 미하일에게는 당시 러시아 내부 문제가 심각한 상태에 있어 이를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에 있었다. 이러한 러시아 사회의 피폐는 동란시대와 폴란드의 침공으로 인한 국토의 황폐화와 차르의 권위가 하락했다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미하일은 내부의 제도를 수습하고 차르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폴란드, 스웨덴과의 전쟁도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리고 슬라브 귀족과 킵차크-몽골-타타르의 옛 귀족들의 갈등도 봉합해야했고, 황폐해진 국토를 재건해야 했다. 미하일은 젬스키소보르를 거의 매년 열어 중요한 일들을 토론에 부치고, 귀족회의인 보야레 두마에도 수시로 자문을 구하면서 러시아를 수습해나갔다. 그리고 한동안은 미하일의 부친인 필라레트가 러시아 정교회 총주교 겸 대군주가 되어 미하일과 함께 러시아를 통치했다. 이 시기의 러시아는 신분제 의회를 가진 다소 제한적인 군주제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전국회의와 귀족회의가 국가의 정책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1630년대에는 한 때 사족대표가 전국회의의 상설화를 주장하기도 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미하일을 계승한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의 치세하에서 신분제도가 정착하고 관청의 수가 50개로 늘어나는 등 중앙행정기관이 정비되면서 전국회의는 점점 유명무실해져 갔다. 이러한 유목민족 특유의 신분제도와 절대군주인 차르로 인하여 의회제도가 정착할 수 있는 국민적 토대가 아직 마련되지 못했던 것이다.
러시아는 신분제 의회를 가진 제한적인 군주제 국가에서 절대군주가 지배하는 가혹한 전제국가로 이행되어가기 시작했다. 1649년에는 전국회의의 비준을 얻어 “회의 법전(Улозени)”이라는 새로운 법전이 제정됐다. 이 법전에서 의미하는 것은 군주권이 최고의 권위로 규정됨과 아울러, 사족의 영지 보유가 보장되어 토착귀족과 사족의 직위가 거의 대등해져 시민들과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전은 도망친 농노의 추적기한을 무기한으로 연장하여 농노제의 법적 토대를 완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농노와 그 가족이 완전히 영주의 소유물이 되었고 농노 계층이 정식으로 성립됨에 따라 절대 다수의 시민과 평등을 강조했던 농노는 보호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이후 농노는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으로 전락해갔다. 로마노프 왕조 초기에 러시아는 동부 우크라이나를 공격해 정복했다. 러시아의 발상지 우크라이나는 당시 폴란드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강화되는 농노제와 기근을 피해 폴란드와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도망친 많은 농민들이 모두 드네프르 강 하류의 카자흐 족 무리에 합류한다.
그리하여 그곳에 강력한 집단이 형성되니, 이들이 “자포로제(Запориз) 카자흐”로 불리는 농민 집단이다. 이러한 카자흐 농민 집단들이 형성되고 폴란드 지주들의 착취를 견디지 못한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저항이 높아가는 가운데 1648년 드네프르 강의 모래섬에 본영을 두고 있던 자포로제 카자흐가 카자흐 고유의 자치를 부정당한 것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폴란드의 착취와 학대로 인하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역의 농민들이 가진 폴란드에 대한 적개심은 오히려 로마노프 왕조가 서쪽 러시아의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자포로제 카자흐 세력의 지도자는 폴란드 정부에 등록된 상류층 카자흐의 아타만(Атаман, 수령), 보그단 흐멜니츠키(Богдан Хмельниский)였다. 이러한 농민 반란은 대다수의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지지했다. 이는 곧 우크라이나 독립전쟁으로 이어졌으나 1651년 폴란드 군에 패하고 대부분의 군사를 잃게 된다. 이에 흐멜니츠키는 모스크바 로마노프 왕조에 군사적 원조를 요청했다. 이에 차르 알렉세이는 우크라이나의 카자흐를 러시아의 보호 하에 두기로 결정했다. 이는 곧 폴란드와의 전쟁을 의미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폴란드와 비교했을 때 군사적인 부분에서는 절대적인 열세였다. 그러나 알렉세이는 폴란드와의 전쟁을 각오해서라도 우크라이나의 카자흐를 보호하고 우크라이나를 정복하는 것을 밀어 붙였다. 이리하여 1654년 우크라이나 카자흐는 모스크바의 차르와 군신 협정을 맺었다. 이후 이러한 우크라이나의 문제는 러시아와 폴란드의 전쟁으로 변화되면서 두 나라는 무려 12동안 장기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전력적으로 열세였던 러시아는 초반 열세를 뒤집고 폴란드와 대등하게 전쟁을 벌여갔다. 12년 간 장기전에 지친 양국은 1667년 휴전협정을 맺고 키예프를 포함하여 드네프르 강 동쪽 우크라이나 영토가 러시아 령으로 편입되었고 서쪽 벨라루스 지역은 폴란드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한편 러시아 정교회도 큰 진통을 겪었다. 모스크바 총주교 니콘(Никон)이 신앙심 깊은 차르 알렉세이의 후원 하에 전례 개혁에 착수했다. 1654년 주교회의는 그리스 관행에 따른 니콘의 전례 개혁을 승인했다.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은 사제 아바쿰(Абакум)을 중심으로 한 라스콜니키 파(Раскольники, 분리파, 고(高) 의식파)를 형성했다.
특히 1666~1667년의 공의회에서는 교권의 강화를 둘러싸고 차르 알렉세이와 대립한 니콘 총주교가 파면당했다. 이로써 러시아 정교회의 교권이 완전히 차르의 권력 아래로 떨어졌다. 여기에서 파문당한 라스콜니키 분리파는 차르의 권력에 저항하는 정교회와 함께 러시아 국가에도 저항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러한 저항은 곧 차르의 진노를 불러왔고 철저한 박해를 통해 분리파의 거점들은 분쇄되고 지도자 아바쿰은 1682년에 화형당했다. 그러자 분리파는 분신으로 저항하여 2만 이상의 신도가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교세는 회복되지 않고 더욱 차별과 동시에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교회와 국가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우랄이나 시베리아 등 벽지로 도피하여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가게 된다. 이러한 사태들은 교회의 분열과 더불어 러시아 정교회의 위상은 크게 약화되어 차르의 절대적인 통치를 받게 된다. 당시 돈 강과 볼가 강 유역에서는 반역의 기운이 일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카자흐가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지역에 도주했던 농민 들이었다. 이러한 농민들의 정신적 지도자가 나타났는데 전설적인 영웅인 스텐카 라진의 등장을 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