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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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는 정말 화려한 귀족문화를 갖고 있었다. 반대로 서민들의 삶은 노예들의 삶 그 자체였다. 본래 로마노프에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명맥을 이었던 모스크바 가(家)를 승계한 엄연한 왕실 혈통이고 키예프 루스 당시 13개의 공국을 이루었던 공후나 공, 백, 후작까지는 러시아의 거대 귀족집단인 보야르(Боярин), 거대 토지를 습득한 두마(Дума), 각 군권을 책임지는 아미르(Aмир) 등이 있었다. 물론 표트르 대제 때 보야르는 해체되었고 두마는 점차 젬스키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가 사라지면서 젬스키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를 대신하는 집단으로 바뀌어갔지만 로마노프 멸망 때까지는 귀족을 대표하는 집단이었다.

Крестьянин покидает своего помещика в день правления Юрьева. 출처 : Картина Сергея В. Иванова
이반 4세의 폭정 이후, 러시아는 동란시대(Смутное время, 1598~1613)라는 대혼란기에 들어간다. 게다가 이반 4세의 사라진 막내 아들인 드미트리를 참칭하는 3명의 반란자가 발생했고 당시 강대국이었던 폴란드와 스웨덴의 내정간섭이 도를 넘고 있었다. 그리고 틈만 나면 폴란드-리투아니아 정예군이 국경을 넘어 각 13공국을 침탈했고 러시아는 당시 폴란드에게 매번 몰리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일수록 러시아의 서민들은 귀족과 왕족들에게 목숨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고 로마노프 가(家)가 집권하자 그동안의 노브고로드 공국에서 유행했던 민회(Вече)를 본뜬 젬스키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의 권위가 점차 약화되면서 표트르 대제 이후, 사라져버린다.
결국 서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지 못한 채 가난에 허덕이게 되고 각 공국의 행정을 담당하는 크냐쟈(Kнязья)에게 일자리를 구해보는데 대개 이들은 각 보야르(Боярин)와 두마(Дума) 집단에서 농사를 짓고 어느 정도 소출을 가져가는 소작 형태의 농노(Крепостное право)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 Крепостное право들의 인권적인 부분에 있어 매우 가혹한 탄압과 수탈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대로 된 급여를 받지 못하고 동원되었으며 왕족 집단과 보야르(Боярин) 집단들은 이 모든 것이 국가를 위한 일이라고 선동 및 정당성을 내세우면서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당시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데 익숙한 나머지 도시들의 시설을 개선하는 것에 굉장히 무감각했는데 도로들은 제대로 된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채, 눈이 녹으면 진창으로 변하는 길이 되었고 제대로 된 수리 시설과 배수 시설이 갖춰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땅바닥에 오물을 버리는 것은 일이 아니었고 각종 전염병들이 창궐하여 당시 러시아 서민들의 수명은 평균 약 40세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난방 시설이 19세기에나 들어와 산업이 발전되면서 뻬치까가 보급이 된 것이었지 이전의 뻬치까는 귀족들만이 향유하던 그런 문화였다. 전염병과 동사자, 아사자들이 속출했고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지배층과는 달리 서민층은 소위 북한보다도 못한 상태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 때부터 바뀌기 시작했고 표트르는 국가 부강책의 일환으로 많은 부분의 변화를 꾀했지만 정작 서구 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의회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많이 주저했다고 한다.
기타 산업시설이나 군사시설은 서구식으로 바꾸었지만 서민들 삶의 질을 향상시키거나 그들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전형적인 전제주의 방식을 고집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표트르의 개혁정책은 반쪽짜리 밖에 될 수 없었고 서구처럼 산업화되었지만 그 근간이었던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정착되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산업화가 정착되자마자 공장에서 일하며 혹사당하는 서민들의 짐이 하나 더 늘어버린 셈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반쪽짜리 개혁은 오히려 차르의 권력을 절대적으로 만들었고 보야르나 두마 등 귀족 집단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결국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개혁은 왕권 강화와 치적에 치중한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