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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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과 이슬람 세계는 해상로를 이용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명 영락제는 정화에게 사상 최대의 대 선단을 주고 서방원정을 단행하여 해상 실크로드를 개척했다. 중국에 들어온 이슬람권 상인들을 통해 두 나라는 서로의 문화를 직, 간접적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도자기 분야에서도 두드러진 특징들이 나타났는데 경덕진 관요에서 본격적으로 아랍어, 페르시아어 등으로 장식된 청화백자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오스만투르크의 대형 도예 접시, 출처 :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서 필자의 직접 촬영
이런 현상은 15세기 영락 시기부터 선덕제와 암흑기의 성화제 시기를 거쳐 16세기 정덕 연간에는 꾸란이 새겨진 이슬람풍 자기제작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는 정덕제가 이슬람교 신봉자였다는 설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슬람 문화의 영향은 중국 경덕진의 도자 제작 방식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일반적인 중국의 자기 무역은 내수용 자기 양식이 그대로 수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일부 상품들은 수출국의 요구에 맞게 맞춤 제작됐다. 명나라 시대에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면서 이슬람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대형 접시와 주전자 등이 현지 사정에 맞게 제작 수출되기도 했다.
중국 국내에서는 이슬람 문화 즉 '회회'라 불리는 무슬림들이 중국 서부 지역에 정착하며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했다. 명 중엽에 이르러서는 국경 지대 근처에 약 10여종의 무슬림 소수 민족이 생겨나기도 했는데 이들이 당시 명대 이슬람풍의 도자기를 소비하는 주요 소비층으로 부상했다. 수출된 자기들은 주로 경덕진 청화백자나 용천요 청자들로 양식은 기존의 중국 전통문화와 구별됐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대형 기종 등 이슬람 문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상품들이 서아시아 지역으로 수출됐다.
톱카프 궁전은 세계 최다의 중국 수출 자기를 소장하고 있다. 소장된 유물은 대체적으로 이슬람 시장을 겨냥해 생산된 수출용 자기들이다. 실제로 톱카프궁전 초기 소장품과 이란의 아르데빌 소장품이 거의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톱카프 궁전 박물관에는 총 10,358점의 중국 수출자기가 소장되어 있다. 중국 자기가 이슬람 도자 제작에 미친 영향을 밝혀내는 것은 중국 수출자기 연구를 비롯해 이슬람 도자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이슬람 지역 중 터키 오스만 제국 시절의 이즈닉 도자기는 15세기부터 원나라와 명나라의 청화백자를 비롯해 청자 영향을 받은 새로운 양식들도 등장하고 있어 당시 중국 수출자기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청화백자가 이슬람 문화권에 다량으로 유입되면서 이즈닉 도자기는 중국의 청화백자를 모방 제작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기형이나 문양 등에서 중국의 청화백자와 상당히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동물자기가 나타난 시기는 서양의 해양세력이 동양을 압도하는 전환점으로 나타난다. 동양보다 뒤졌던 유럽의 경제력이 앞서 나가기 시작한 분기점이기도 하다. 전쟁의 진짜 원인은 후추와 비단 등의 교역권을 둘러싼 갈등. 디우 해전에 참전한 이슬람 연합함대의 구성을 보면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그대로 드러난다. 이슬람 세력 간 연합을 가장 먼저 주장한 캘리컷은 중계무역항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중국 비단과 도자기, 인도네시아, 인도의 각종 향신료가 1차로 모이는 집산지였다.

오스만투르크의 대형 동물 자기, 출처 :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서 필자의 직접 촬영
캘리컷은 교역품을 모아 이집트와 오스만 제국으로 재수출했다. 이집트와 오스만은 비단과 향신료를 베네치아에 넘겼다. 베네치아가 유럽 기독교 국가이면서도 이슬람 편을 들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귀한 동양 물품 교역 독점권을 위협받는 경제 위기 상황이 종교와 인종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포르투갈도 천신만고 끝에 개척한 동양 항로에서 직교역을 추진하다 캘리컷이 반발하자 대규모 함대를 보냈다. 포르투갈이 집요하게 매달렸던 교역품은 후추였다. 요즘 1만5,000원 어치의 후추가 유럽에서는 좋은 집 한 채에 해당하던 시절, 포르투갈은 후추 교역권 확보에 국운을 걸었다. 디우 해전은 동서양의 무역 전쟁이었던 셈이다. 디우 해전 이후 인도 서해안의 토후국들은 친 포르투갈로 외교 노선을 변경하고 이집트를 차지하고 있던 맘루크 왕조의 권위도 크게 떨어졌다. 힘이 약해진 맘루크 왕조는 디우 해전 8년 뒤인 1517년 오스만투르크에 정복 당해 속령으로 떨어졌다.
오스만투르크는 1538년과 1547년 직접 대규모 함대를 디우에 내보내 포위전을 펼쳤지만 모두 실패하고 결국 인도양의 제해권은 포르투갈로 넘어갔다. 작은 나라 포르투갈이 100년 넘게 약진하는 출발점이 바로 디우 해전이었다. 만약 디우 해전에서 포르투갈이 졌다면 일본에 이르지도, 조총 전래도 발생하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디우 해전이 역사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유럽을 자극했다는 점이다. 보급마저 여의치 않은 이역만리의 해전에서 소국(小國) 포르투갈이 승리했다는 소식에 들뜬 유럽 각국은 배를 동쪽으로 보내 대항해와 침탈의 시대를 열었다. 주경철 서울대 교수의 저작 <문명과 바다-바다에서 만들어진 근대>에 따르면 떠다니는 폭력, 그 자체였던 유럽의 선박이 평화롭고 자유로운 해역이던 인도양에 등장한 사건은 강력하고 체계적인 폭력의 세계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