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238185&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빨치산의 태평소 소리 좋아했던 미군, 국악의 전도사가 되다[이희용의 월드코리안 12] 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민족·국제 이희용(hoprave)▲가야금 타는 해의만만년의 해...
목곽(木棺)이나 석곽(石棺)이 아닌 독(甕)이나 항아리(臺) 등 토기를 널로 사용하는 무덤은 장소와 시대를 불문하고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면 각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크고 작은 항아리에 뚜껑을 덮어 수직으로 매장한 옹관묘가 발견되어 옹관묘의 기원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간 규모의 옹관이나 수직매설한 옹관 등은 성인을 굽혀묻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규모가 큰 옹관묘 등은 성인을 펴묻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터키 각지에서 옹관묘가 출토됨에 따라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석관으로 매장하기 전까지는 아마 터키 전 지역에서 옹관이 장법의 대세를 이루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터키 이즈미르 고고학박물관에 존재한 고대 프리기아 시대의 옹관묘,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Çavlum Necropolis (차브룸 네크로폴리스)에서 발굴된 옹관묘. 여기를 거쳐 아일랜드까지 존재한 켈트의 옹관묘, 이것은 청동기 시대 옹관묘로 이 지역의 청동기는 프리기아-히타이트 초기 시대로 이로써 옹관묘는 북방 양식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프리기아 미다스 왕의 실제 사료에 나타난 통치 시기와 주변 민족과의 관계는 기존의 연구에 있어서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스키타이와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 연구한 측면이 많았고 주로 사료적인 분석보다는 신화적인 요인을 표현한 연구가 많았기 때문이다. 스키타이와의 관계성은 우선 B.C 1200년경으로 연대 측정된 히타이트 제국 관련, 다수의 아카드 문자로 새겨진 기록에서 스키타이와 함께 언급된 프리기아가 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나타난 프리기아는 스키타이 소속이었다는 것이 분명해보이긴 하지만 히타이트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같은 스키타이계였지만 서로 존재하고 있었던 위치가 달랐기 때문에 계통은 같아도 서로 간에 자주 충돌이 발생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현재 에스키세히르에 있는 포르숙 강에 프리기아가 위치하고 있었고 앙카라 동부 지역에는 히타이트가 위치하고 있었다. 아나톨리아를 양분하고 있었던 히타이트와 프리기아의 국경을 이루고 있는 지역은 두 나라의 권력 중심은 물론 아니었고 프리기아는 그리스, 히타이트는 수메르가 존재한 오리엔트에 권력의 중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서로 충돌한다 할지라도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된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그렇기 때문에 프리기아와 히타이트의 이동으로 인하여 아나톨리아에 정착한 배경에 관해 많은 관심이 두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페니키아에서도 무덤은 옹관묘를 사용했다고 한다. 대규모로 성행했던 것은 아니고 해안지대에서 사용했는데 해안지역과 가까운 곳에 세계적으로 옹관묘가 발견됨에 따라 해안가에 위치한 사람들이 옹관묘를 주로 사용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우리도 옹관묘가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가, 제주도 해안가에 주로 분포해 있다. 사실 페니키아라고 부르는 건 로마 제국 때부터의 일이고, 당시에는 각각의 도시 국가 이름으로 불렸다. 성경에서 나오는 두로와 시돈이 바로 지중해 인근의 페니키아인 항구 도시인 티루스(티레)와 시돈이다.
조금 더 따지고 보면, 히브리인과 페니키아인은 굉장히 가까운 관계이다. 혈통상으로는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고 언어도 방언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서로 통하고, 문자도 완전히 동일해서 페니키아 문자가 곧 고전 히브리 문자이다. 다만 페니키아인과 히브리인이 가깝다고는 하지만 히브리인에 더 가까운 민족들이 있었는데 에돔, 모압, 암몬이다. 다만 이들은 하스몬 왕조의 지배 이후 유대인에 동화되었다. 심지어 페니키아 인들은 자신들을 푸트 또는 카나안이라고 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성경에 나오는 바로 그 가나안이다. 다른 것은 종교뿐으로 페니키아의 주신은 성경에 나타나는 바알이었다. 그러므로 가나안 사람 중에서 해안가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다신교 지역이 페니키아, 내륙의 농업 / 목축 일신교 지역이 이스라엘이라고 봐도 좋을 수준. 이들은 여러 이유로 경쟁했지만, 교류도 많았는데 특히 궁정이나 신전 같은 건물을 지은 자들이 페니키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페니키아 인들은 최초로 갤리선을 사용하여 해상 무역으로 번성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무역의 기반은 다른 민족들을 압도하는 탐험기술 덕분인데, 이는 하단에 후술한다. 성경에는 티레의 무시무시한 무역 규모를 기록하면서 상아로 배를 건조하고 은으로 도로를 포장하며 금으로 높은 누대를 쌓는다고 적어 놓았다. 무역을 하면서 지중해 여러 곳에 식민지를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로마와의 포에니 전쟁으로 유명한 카르타고 역시 페니키아인들의 도시였다. 사실 카르트 하다쉬트 말고도 많았는데, 원체 여기저기 진출하다 보니 카나리아 제도에도 도시가 있었으며 아프리카 횡단 과정에서 서아프리카 일대에 건설한 페니키아 도시들은 5세기경에도 존속했다. 페니키아인들은 장기간 탐험과 항해를 하는 과정에서 상업으로 번성했는데, 그 과정에서 이전의 문자와 달리 상인들이 사용할 법한 간편한 글자가 필요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수메르의 설형문자를 발전시켜 알파벳을 만들었는데, 그게 최초의 알파벳인 페니키아 알파벳이다. 페니키아 알파벳은 고대 그리스 알파벳, 에트루리아 알파벳, 로마 알파벳(라틴 문자)에 영향을 준 듯하다. 그뿐만 아니라 페니키아 알파벳에서 파생된 아람 문자는 아랍 문자, 브라흐미 문자 등의 기원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