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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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검은색 석관이 티무르가 잠들어 있는 관이다. 일설에 의하면 티무르의 검은돌로 된 관 속에는 “내가 이 무덤에서 나올 때 가장 커다란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Bu mezardan çıktığımda, en büyük felaket yaşanacak).”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어 아무도 관을 열지 않았다 한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 있는 티무르 영묘의 티무르 석관,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그러나 1941년 6월 19일 소련의 조사에 의해 처음으로 개봉되어 티무르가 다리에 장애가 있음을 확인했다. 그래서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중세 시대 별칭이 확인되었다. 관 뚜껑 연지 3일 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소련은 2천만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 후에 두려움을 느낀 소련에 의해 뚜껑이 납으로 용접되어, 이후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1984년에 NHK 다큐멘터리 <실크로드> 촬영 과정에서 당시 발굴에 참여한 소련 촬영기사 발레리 카유모프(Валерий Каюмов)를 인터뷰했는데, 그의 증언을 요약하면 대략 이러하다.
"촬영이 시작된 당일 찻집에서 쉬고 있을 때 초라한 모습을 한 노인 3명 중 1명이 아랍어로 쓰여진, 위 인용문과 비슷한 구절이 적힌 책을 들이대며 경고했다. 하지만 나(카유모프)는 조사단의 고고학자들을 불러왔고, 그들은 노인들을 지팡이로 쫓아버렸다.그리고 무덤을 연 것이 1941년 6월 22일이었는데 아침 일찍부터 무덤 주위에는 호기심에 천 명도 넘는 군중이 모여있었다. 더운 계절이라 새벽 5시부터 발굴을 시작했고, 대리석 판자를 걷어내자 절반 이상 썩은 나무 관이 나왔고 곧 티무르의 유해가 보였다. 인류학자 미하일 게라시모프(Михаил Герасимов, 1907~1970)가 관 속으로 내려가 티무르의 뼈를 하나씩 주워 위로 올렸다. 무덤의 학술조사는 그날 하루로 끝났고,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이튿날에 듣고 놀랐다. 발굴을 마친 뒤 나는 24일 타슈켄트로 돌아갔고 바로 독소전쟁 전선으로 출발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