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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식재료들, 필리핀 및 멕시코 사이의 경제 교류의 산물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8 00:20:42

지금은 현대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식재료들이 사실 외부에서 수입된 것들임을 깨닫는 경우가 간혹 발생한다. 그러한 가운데 상당수는 수백 년에 걸친 마닐라와 멕시코 사이 경제 교류의 산물로 나타난다. 16세기 말 이후 옥수수, 감자, 토마토, 파인애플, 피망, 땅콩 등의 식재료가 당시 멕시코에서 필리핀 마닐라를 거쳐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로 퍼졌다. 또한 마닐라를 비롯한 필리핀을 다녀온 사람들 가운데 능력 있는 능숙한 여행객들은 그들의 문화에 미묘하게 흘러 들어간 멕시코, 혹은 라틴적인 요소를 포착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16세기 중반 이후 수백 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로써 광대한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긴밀하게 교류한 두 지역 간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연결 고리는 은(銀)이다. 동남아시아가 고대 시기부터 현재까지 상업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특유의 지리적 위치 때문인데, 특히 외부 세력이 해로를 통해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로 향할 때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스페인 지배 시기의 필리핀 제도,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고대 동남아시아는 인도와 중국 문명의 교차점이었고, 이슬람 상인들이 동북아시아로 향하는 관문이었으며, 포르투갈로부터 시작된 유럽의 국가들이 동북아시아로 건너가기 전, 먼저 점령하고 식민화한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21세기 현재 서아시아의 석유가 동북아시아로 향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 역시 여전히 말라카 해협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물동량을 자랑하는 무역 회랑 가운데 하나이고, 싱가포르 번영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의 경제적 중요성은 단순히 지리적인 요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지에서 생산되는 특산품 역시 전 세계의 상인들을 불러 모으는 요소였다. 대륙 부 동남아시아의 쌀과 목재, 자바 지역을 비롯한 해양부 동남아시아의 쌀과 주석, 해산물 등은 중국 상인들과의 오랜 무역을 가능하게 해준 상품들이었다. 


거기에 중국의 비단, 도자기, 차, 남아시아 대륙의 면화와 후추, 계피 등의 향신료, 서아시아의 침향까지 거래되면서 15, 16, 17세기 동남아시아는 말레이, 자바, 베트남 참족 등의 현지 상인과 중국, 아라비아, 인도, 유럽 등의 외부 상인들이 경쟁하고 협력하는 국제시장(Emporium)을 형성하였다. 그 중 서아시아의 이슬람 상인들과 유럽 상인들에게 있어 가장 인기가 있었던 상품은 다른 무엇도 아닌, 검은 황금(Black Gold)이라 불리던 동남아시아 몰루카 산 정향, 육두구, 메이스 등의 향신료 3대장이다. 16세기 동남아시아는 변화의 시기였다. 해양부 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11세기부터 시작된 대륙 부 동남아시아의 소승 불교 전환이 베트남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8~9세기 이후 이슬람 상인들의 동남아시아 및 동북아시아 진출로 시작된 해양 실크로드에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들은 유럽 이베리아 반도의 두 나라,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유럽의 두 국가가 동방으로 진출하게 된 계기는 명백하다. 1511년 포르투갈의 함대가 말라카를 무력으로 점령한 이후의 기록이 그 목적을 잘 보여준다.


 “말라카는 무어인(Moor·무슬림)들이 매년 서아시아로 가져오는 모든 향신료와 약재의 집산지다. 카이로와 메카는 완전히 망할 것이고,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우리 포르투갈을 통해서만 향신료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거의 1,000년에 가까운 시기 동안 무슬림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던 해상 실크로드에서 최고의 상품은 남아시아 및 동남아산 향신료였고, 같은 시기 중세 유럽 상류층들은 이 향신료에 매혹 당해 있었다. 문제는 이 향신료가 이슬람 상인들과 베네치아 상인들 사이의 독점 공급을 통해서만 지중해로 유통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라비아 인들은 이러한 향신료의 산지를 유럽인들에게 절대 알려주지 않았고, 설령 유럽 인들이 짐작한다 하더라도 막연하게 그들이 인도라고 인식하는 동방의 어느 지역이라고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지리상의 발견’이 이루어지지 않던 시기 동방과 유럽의 길목을 장악하고 있던 강대한 이슬람 세력을 뚫고 확보할 방법도 없었다. 무엇보다 향신료는 유통 경로가 길고, 독점 공급이었던 관계로 그 가격은 같은 무게의 황금에 비할 정도로 비쌌다. 


15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탐험가들이 왕족이나 귀족의 후원을 받아 끊임없이 동방으로 향하는 해상 실크로드를 노린 것에는, 더 이상은 금보다 비싼 돈을 주고 이슬람 상인들의 부유하게 만들어 주기 싫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한 노력들이 결국 결실을 맺어 1492년 스페인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의 함대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고, 1498년 포르투갈 왕의 후원을 받은 바스코 다 가마의 함대가 리스본을 출발해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 서부 해안 캘리컷에 도착하는 항로를 발견했다. 그리고 1521년 포르투갈 인이지만 스페인의 후원을 받은 마젤란이 만든 함대가 아메리카 대륙을 지나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 세부 섬에 도착하였다. 마젤란은 세부에서 사망하지만, 그가 만들었던 함대의 동료들은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지나 희망봉을 통해 이베리아 반도에 도착함으로써 지구를 돌아 스페인에 도착하게 된다. 이와 같은 대항해시대의 개막과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이슬람 상인들의 독점을 벗어난 유럽인들의 동방 진출로가 열린 것이다.


태평양 항로를 통해 아메리카 대륙과 필리핀을 연결할 수 있음을 알게 된 스페인은 지금의 멕시코 지역에 대한 식민 지배를 완료하고 1571년 필리핀 루손 섬의 마닐라를 점령하였다. 이 당시 마닐라는 말라카 못지않은 동남아시아 무역의 대항(大港)으로 중국 상인, 동남아시아 현지 상인, 인도 상인, 이슬람 상인들이 모여 국제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마닐라를 점령하고 정치적 지배자로 이들 다국적 상인들을 상대하게 된 스페인의 상인들은 동방의 귀중품을 구입하기 위해 지불한 화폐가 은화였다. 포르투갈의 경우 반대급부로 지급할 만한 본국의 물품이 없어 주로 아시아 지역 내 중개 교류를 통한 차익으로 무역 연결망들을 유지한 반면, 스페인의 행운은 그들이 점령한 멕시코와 페루에 수백 년을 사용해도 마르지 않을 대량의 은광이 매장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멕시코 현지인들이 아스테카(아즈텍) 문명의 지도자들에게 은을 대량으로 공물로 바치는 것을 목격한 스페인 인들은 이 은광을 점령하고 본격적으로 채굴하여 스페인 은화를 대량으로 주조하기 시작한다. 주조된 은화는 멕시코의 아카풀코를 출발해 태평양을 건너 마닐라로 옮겨졌다. 


마닐라에는 대량의 은화를 감당해줄 또 다른 상인집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명(明)나라 시대 해금(海禁)을 뚫고 밀수를 하러 온 복건(福建)의 상인들이었다. 16, 17세기 중국 명나라 시대의 경제는 송나라 시대에 비해 더욱 그 규모가 거대해졌고, 그에 따라 국가에 대한 세금 납부 및 국내 상업 거래를 위해서는 기존 동전이 아닌 더 높은 단위의 화폐가 필요하게 된다. 물론 금보다는 흔하지만, 동보다는 귀한 귀금속인 은이 주요 화폐로 활용되는데, 당시 명나라 조정은 모든 세금을 은으로 받는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은을 통한 세금 납부는 이후 청나라 시대에도 지정은제(地丁銀制)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이어져 16세기 이후 수백 년 동안 중국은 전 세계로부터 끊임없이 은을 흡수한다. 영락제 말부터 명나라 시대의 대외정책은 명백히 해금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일찍부터 바다를 통한 무역 거래를 주요 수입원으로 하고 있던 복건의 상인들은 해금을 무시하고 밀수에 몰두하는데, 그 주요 거래처가 바로 마닐라였다. 


스페인 상인들이 가지고 오는 대량의 은화 공급은 중국 대륙의 은 수요와 만나 막대한 부를 복건의 상인들에게 가져다주었다. 1700년대 말 마닐라 전체 인구 42,000명 가운데 15,000명이 중국계 상인 및 기술자, 노동자 그룹이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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