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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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2년 이반 4세는 카잔 칸국 정복을 기원하기 위해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바실리 성당을 세우기도 했다. 우선 북방 카마 강에 위치한 카심 칸국의 군사들과 합류해 카마 강 일대 타타르족을 섬멸하기 시작했다. 이는 카잔과 아스트라한 정복을 위해 공격을 감행할 때 배후를 요격당할 가능성을 소멸시키기 위해서였다. 카마 강 유역의 요새들을 점령함으로써 이반 4세는 볼가 강으로 나가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스비야즈스크(Свияжск) 전투도, 출처 :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역사박물관에서 필자의 직접 촬영
마침내 이반 4세는 같은 해, 10월 1일, 카잔 칸국에 대한 진공 개시를 명령했다. 총 병력 14만의 러시아군은 카잔 칸국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주변의 스비야즈스크(Свияжск) 지역에 도달했다. 같은 해, 10월 8일 볼가 강변의 스비야즈스크(Свияжск) 평원에서 이반 4세가 직접 이끄는 14만의 러시아군과 카잔 칸국의 샤흐갈리 모크사마르트(Шах-Али Моксамарт) 칸이 이끄는 20만의 카잔군이 평원을 가운데 두고 서로 대치했다. 정오 때 안개가 걷히자 카잔군이 공격을 개시했다.
러시아군은 곳곳에 하천이 흐르는 낮은 구릉지대를 주축으로 진영을 형성하고 있었다. 빠른 경기병 대를 주축으로 하는 카잔군의 예봉을 애초부터 봉쇄하기 위한 러시아군의 전략이었다. 카잔군은 러시아군을 간단히 포위하지 못하고 러시아군 진지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야 했다. 이어 중앙에서는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오후 3시경 양편 군대 모두 태반이 전사하고 남은 병사들도 탈진했다. 그 때 숲속에 매복해 있던 러시아의 마지막 예비 부대가 카잔 군을 습격했다.
샤흐갈리 모크사마르트(Шах-Али Моксамарт) 칸과 남은 카잔 병사들은 10만여 전사자를 남기고 모두 도주했다. 이것이 카잔 칸국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는 스비야즈스크(Свияжск) 전투의 결말이었다. 전투는 비록 카잔 군의 참패로 끝났으나 러시아군의 피해도 막심하여 군대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이반 4세 자신도 전투 중에 화살을 맞아 의식을 잃고 쓰러졌으나 전투가 종결된 후 겨우 깨어났고, 전쟁터에서 치른 장례식만도 10일이나 걸렸다. 카잔 칸국과 동맹을 맺은 크림 칸국의 군대는 이틀 후, 볼가 강에 도착했으나 그 때는 이미 전투가 종결된 이후였으며 크림군은 군대를 돌려 퇴각해갔다.
이 전투로 인하여 카잔군의 주력군은 거의 분쇄되었고 러시아는 카잔을 공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 러시아군의 중추 역할을 한 모스크바 대공국의 군대와 이반 4세의 위세는 크게 높아졌고, 이반 4세는 스비야즈스크(Свияжск) 전투 이후 추가 병력 지원을 요구했다. 당시 키예프 13공후들은 추가적으로 군사들을 징집하여 다시 10만의 군대를 스비야즈스크(Свияжск)로 파견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카잔을 공격하는 것은 10만의 구원군이 스비야즈스크에 도착하기까지 한 달을 더 기다려야 했다.
이는 몽골-타타르 및 카잔군의 군세가 아직 남아 있었기에 남은 수만의 군세로 카잔 성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