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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3.16 《비판적 관점에 대하여》
  • 조율여백
  • 등록 2026-04-18 11:52:27
2026.3.16 《비판적 관점에 대하여》

인간 사회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종종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됩니다.
“이제는 그만 부정함과 모순을 보라.”
“세상의 더러움은 잊어버려라.”

일면 이러한 조언은 삶의 피로를 줄이기 위한 현실적 태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사와 사회의 모순, 불합리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비판하는 일은 매우 불편하며, 때로는 감정적으로도 큰 소모를 요구합니다. 그 과정은 결코 쾌적하지 않으며, 오히려 피로와 회의, 그리고 일정한 고립감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더욱이 그러한 노력에 비해 즉각적인 보상이나 가시적 성과는 거의 없거나 매우 제한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이러한 시도를 비효율적이거나 무의미한 일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지점에서 다른 방향의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만약 인간 사회의 모순과 불합리를 인식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이들마저 이를 외면하고 방치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부정과 왜곡은 스스로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방치될수록 점진적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처음에는 국소적인 문제로 시작되더라도, 반복된 묵인과 무관심 속에서 점차 구조화되고, 결국에는 일상적인 관성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는 흔히 언급되는 ‘깨진 유리창’의 비유와도 유사합니다. 작은 무질서가 방치될 때, 그것은 더 큰 무질서를 불러오는 기제로 작동합니다. 인간은 그러한 환경에 점차 적응하게 되고, 결국에는 부정함 자체에 대한 감각이 둔화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비판적 관점과 표현을 단순한 부정이나 불평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들이 등한시하고 있는 영역을 환기시키고, 왜곡이 무분별하게 확산되는 것을 억제하는 하나의 최소한의 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율여백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과 사회는 본질적으로 완전할 수 없는 구조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기에 부정과 왜곡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증폭되기 이전에 인식하고, 가능한 범위 안에서 조율하는 데 있습니다.

저는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널리 이롭게 쓰이고자 하는 무소유적 이타성’의 방향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향성은 선택적 가치라기보다, 스스로에게 반복적으로 되묻게 되는 기준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비록 이러한 과정이 불편하고, 때로는 피로와 거부감을 동반한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일부에게는 비효율적이거나 미련한 선택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의 구조를 돌아볼 때, 합당하고 정제된 상태를 유지하는 일은 매우 어렵지만, 불합리와 왜곡으로 기울어지는 일은 놀라울 정도로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적 시선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일정한 방향성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조율 행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정화는 불가능할지라도, 왜곡의 확산을 늦추는 일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 가능성이 미약하더라도, 저는 그 역할을 쉽게 내려놓을 수 없음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립니다.

— 조율여백 이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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