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238185&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빨치산의 태평소 소리 좋아했던 미군, 국악의 전도사가 되다[이희용의 월드코리안 12] 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민족·국제 이희용(hoprave)▲가야금 타는 해의만만년의 해...
띠띠띠띠리 띠띠띠리 띠리리리리~
테트리스의 이 정겨운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이런거보면 테트리스를 만들었던 알렉세이 파지트노프(Алексей Пажитнов)가 천재가 아닐까 싶다. 알렉세이 파지트노프는 1985년 드미트리 파블로프스키와 바딤 게라시모프의 도움으로 테트리스를 창조했다. 테트리스는 1986년 서구사회에 나타났다. 파지트노프는 또한 같은 이론이지만 위에서부터 보드를 보는 3차원 모델링 환경을 가진, 덜 알려진 테트리스 속편, 웰트리스(Welltris)를 만들었다. 소비에트 관료제는 테트리스를 라이센스화 시키고 관리했으며 "From Russia with Love" (NES: "From Russia With Fun!")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테트리스를 광고했다. 그는 소비에트 정부에 고용된 상태이기 때문에, 파지트노프는 인세를 받을 수 없었다.

러시아 모스크바 성 바실리 성당,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소련이 붕괴된 이후, 브라드미르 포크힐코와 함께, 파지트노프는 1991년 미국에 이주했으며 헨크 로저스와 함께 테트리스 회사 (The Tetris Company)를 설립했다. 러시아의 역사는 모스크바 크레믈린과 붉은광장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방송에서 러시아 관련 뉴스를 볼 때면 견고한 크레믈린 성벽과 넓은 붉은광장, 양파 모양의 돔이 특징인 성 바실리 성당이 배경화면으로 나온다. 이곳은 수백년 동안 러시아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발전했다. 물건을 사고팔던 장소여서 매매 또는 장사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토르크 광장’이라고 불렸다. 이곳이 러시아 전역으로 이어지는 길의 중심이 된 것은 15세기부터다.
16세기에는 광장 남쪽의 삼위일체 교회 이름을 따서 ‘삼위일체 광장’으로 바뀌었고 1571년 대화재 발생 후에는 ‘화재광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17세기 후반 국가의 명령으로 국립역사박물관 등 공공건물이 주변에 들어서면서 점차 번화하게 되고 18세기 초부터는 모스크바 문화와 생활의 중심지로 발돋움한다. 1702년 표트르 대제가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붉은광장에 연극 공연장을 세우기도 했다. 성 바실리 성당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이었던 이반 4세가 러시아에서 카잔 칸국을 멸망시킨 것을 기념하여 봉헌된 성당이다. 1555년 건축을 시작하여 1561년 완공하였다.
1600년에 이반 뇌제의 종탑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러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기도 하였다. 입장료 700루블 (한화 약 13,100원)이다. 보통 정교회 성당은 입장료 안받는데 여기는 세계문화유산이라 입장료를 받는데 진짜 무쟈게 비싸다. 아마 외국인 쿼터 룰이 적용된듯 보인다. 당시 모스크바는 킵차크 칸국의 잔존 세력들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1480년 킵차크 칸국이 카잔, 아스트라한, 크림 칸국으로 분열된 이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슬라브 루스의 세력이 회복되자 이들과 격렬하게 저항함으로써 다시 러시아 지역은 대혼란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러시아와 몽골의 전쟁은 시간만 끌고 얻는 것 없이 막대한 병력 손실 및 전사자만 내고 종결되었다. 동시에 크림 칸국의 군사가 모스크바까지 공격해와 약탈을 감행했고, 동부 지역에도 타타르 족이 공격해와 약탈했지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1560년까지 흉년이 계속되었으며, 전염병까지 확산되었다.
모스크바의 군사적 관심이 리보니아 지역에 집중되는 시기를 이용하여 크림 칸국의 지배자 데보레트 기레이(Deboret Girei)는 12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여러 번 모스크바를 공격했고, 1572년 모로디(Morodi) 전투에서 패전하여 끝날 때까지 모스크바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어서 수십 년에 걸쳐 남부 국경지대는 노가이(Nogai) 오르다 및 크림 칸국의 약탈을 당해 지역 주민들이 연행되어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 녹지 지대의 관리 및 경비에는 연간 수만 명의 병사의 배치를 필요로 하여 그러한 부담은 모스크바를 소모시켜 사회적, 경제적 발전을 저해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반 4세는 카잔 칸국을 정벌한 바 있다. 카잔 칸국은 우르그 무함마드(Urg Muhammad)와 마프무데크(Mapmudek)가 카잔에 자리 잡고 창건한 것이 시초로 나타난다. 타타르스탄의 주민 대부분이 카잔 칸국의 후예들로 나타난다. 이들은 이반 4세에게 패하기 전, 이미 궁정 내부는 심각한 분열을 맞이하고 있었고 그로 인하여 모스크바 측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카잔 칸국이 멸망한 후, 다음 상태는 아스트라한 칸국이었다. 이들은 수도 아스트라한을 중심으로 볼가 강, 우랄 강 중하류의 초원지대를 영유하고, 주로 수렵, 어로, 목축 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지리적 위치로 인해 동서의 통과 무역이 번창하고 킵차크 칸국의 옛 수도인 사라이의 상업적 기능을 계승해서 다른 칸국들에 비해 발전을 빠르게 이루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노얀(Noyan), 베그(Beg) 등의 귀족 계급 항쟁이 격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크림 칸국 및 노가이 가문 사이에 존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 비해 군사력이 취약한 아스트라한은 정치적인 간섭을 받아 왕권은 약화된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1554년 카잔 칸국을 멸망시킨 러시아의 이반 4세의 침공을 받았고 군사적으로 밀린 아스트라한 칸국은 러시아에 멸망했다. 남은 것은 크림 칸국이었지만 이들은 다른 칸국들에 비해 군사적으로 가장 막강했다. 크림 칸국은 바투의 아우 토카티무르(Tokatimur)의 후예 하지 기레이(Haji Girei)가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독립한 다음 건국한 몽골-타타르계 국가이다.
크림반도 남쪽 바그체 사라이(Bagche Saray)에 수도를 정하여 북방 및 동방과 연락하는 상업로인 흑해(黑海)로의 출구를 봉쇄해 중개 무역을 독점했고, 제노바인의 식민지인 카파(Kafa)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했다. 그러나 제2대 멘그리 기레이(Mengri Girei)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침략을 받아 속국이 되었으나 이후에도 육지로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기 때문에 2세기에 걸쳐 존속하면서 러시아를 자주 공략했다. 그러다 1738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멸망하면서 유럽러시아에서 몽골-타타르 세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