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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유럽에 아시아식 도자기가 유행한 이유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8 20:58:48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보유한 군대로 처음으로 벌인 일이 해적질이었다. 설립한 지 이듬해인 1603년 2월, 네덜란드 인들은 말라카 해협에서 포르투갈 상선 ‘산타카타리나’호를 공격해 나포했다. 배 안에는 엄청난 화물이 실려 있었다. 포르투갈은 이러한 행위를 불법적인 약탈로 간주하고 약탈 물품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네덜란드는 양국이 교전 상태에 있었음을 들어 거부했다. 약탈된 물품들은 경매에 넘겨졌다. 중국 비단 등 고급 직물 60톤과 청화백자 16톤 등 각종 장식품, 설탕, 향신료, 면화 등이 경매의 매물로 나왔다. 경매에는 유럽의 부호와 귀족 그리고 상인들이 대거 참여해 대단한 호응을 보였다. 

유럽 일반 가정의 중국식 다기(茶器),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당시 포르투갈 상선이 운반하던 이 물품들은 아시아 역내 교역 품이었기 때문에 유럽인이 처음 보는 상품들이 많았다. 특히 도자기의 경우, 동일한 무게의 은으로 매겨진 가격 이상의 고가에 낙찰되었다. 나포선에서 약탈한 재물로 인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자본금을 50%나 늘렸다.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박들은 포르투갈 선박 나포에 혈안이 되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의 해상 무역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 때까지 유럽에서 생산하는 도기들은 저온에서 만들어져 강도가 약했을 뿐 아니라 표면에 바른 유약도 뜨거운 물에 닿으면 녹아내려 사용하기 불편했다. 이후 중국 도자기는 유럽인의 최고 기호품이 되어 유럽 귀족과 부호들의 생활 방식을 바꾸게 되었다. 


곧 유럽인들이 쇠로 만든 자기 등에 음식을 담아 손으로 주워 먹던 야만적 방식에서 도자기 식기를 갖추고 품위 있는 식사를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유럽 왕족과 귀족들은 중국 도자기를 경쟁적으로 수집해 궁전이나 집을 장식했다. 오늘날 유럽 궁전에 가면 도자기 방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시 중국 고급 도자기 가격은 계속 올라갔다. 흑인 노예 7명 또는 중산층 주택 한 채를 살 수 있는 가격에도 거래되었다. 유럽에선 중국 도자기가 단순한 식기가 아니라 부유함과 교양의 척도가 되었다. 유럽 내 도자기 열풍의 영향으로 17~18세기 유럽에서는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에 중국풍 예술이 결합되어 있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는 미술 사조가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네덜란드가 강력해지고 있는 무렵 유럽은 700~800도에서 굽는 토기와 800~1000도에서 굽는 도기까지는 생산할 수 있었지만 1,300도 이상으로 열을 끌어 올리는 가마를 만드는 기술은 없어 자기는 생산하지 못했다. 당시 1,300도가 넘는 고온의 가마를 만들어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조선이 유일했다. 도자기 재료인 고령토 또한 구하기 힘들어 한동안 동양 도자기에 의존해야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년에 10만 점이 넘는 중국 도자기를 수입했다. 이후 중국이 해금령을 내려 도자기 수출이 중단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조선의 자기를 직수입하려고 ‘코레아’라는 상선을 건조했으나 일본이 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하여 조선 자기 수입은 불발되었다. 


대신 일본이 임진왜란 때 납치한 조선 도공들이 1616년 아리타(有田) 자기를 개발하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이를 대량 수입해 일본은 큰 부를 쌓게 되었다. 70년 동안 아리타 자기 700만 점이 유럽으로 팔려 나갔고, 찻잔 받침과 찻주전자를 만든 것은 아리타 자기가 처음으로, 유럽 귀족들의 차 문화가 아리타 자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하여 19세기까지 도자기 2천만 점이 수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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