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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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파르티아 전쟁과 카르헤 전투
B.C 1세기, 크라수스는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정치로 로마를 통치하고 있었지만 점점 흔들리는 입지로 인해 고민하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막대한 재력으로 대중과 원로원 의원들의 환심을 사면서 입지를 다졌지만 당대 로마 시민들이 가장 열광하던 군사적 업적이란 측면에서 경쟁자들에게 현격하게 밀리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젊은 나이에 지중해의 해적을 일소하고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당시엔 알렉산더 대왕을 의미하는 '마그누스'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천재 장군이었고 카이사르 역시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갈리아 전체를 정복하면서 막대한 인기와 부를 거머쥐었다. 이전까지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와 로마의 주요 재력가들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었으나 갈리아에서 쌓아올린 막대한 부로 모든 빚을 청산하게 된다.

터키 동부 하란 지역의 카르헤 전투가 벌어졌던 평원,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반면에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을 진압한 공적은 노예 반란 자체를 암묵적인 행위로 일관하던 당대 분위기로 인해 묻히고 말았다. 원로원은 스페인에서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폼페이우스에겐 성대한 개선식을 열어주면서도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크라수스는 그냥 무시해버린 것이다. 크라수스가 강력하게 요구해서 나중에 개선식이 열리긴 했지만, 폼페이우스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소규모에 불과했다. 정복을 통해서 성장한 정복국가 로마에서 대중들이 크라수스의 노예 반란 진압보단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외 정복에 더욱 열광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결과 크라수스는 새로운 군공(軍功)을 강렬하게 원하게 되었고, 그 목표물로 선택한 것이 동방의 떠오르는 강국 파르티아 원정이었다. 그때까지 파르티아는 로마에 특별히 적대적 행위를 한 적이 없었고 오히려 양국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따라서 로마 내에서도 파르티아 원정에 대한 반발이 심할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로원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일단 찬성하자 크라수스는 자신의 재력으로 모집한 군단들을 이끌고 시리아로 출발했다. 하란에 도착한 크라수스가 본격적으로 침공 준비를 하자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는 로마에 전쟁 자제를 촉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파르티아는 왕위 계승을 두고 벌어진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데다 강대국 로마와의 대결은 가능한 한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전쟁을 하기로 굳게 결심한 크라수스와 파르티아 사신의 고압적 태도로 인해 회담은 별 효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는 이 상황을 묘사하며, 파르티아 사신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크라수스 앞에서 읽었다고 전한다.
"만약 파르티아를 침공한 로마군이 로마 원로원에서 보낸 것이면 샤한샤께서는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군대가 망령 들린 크라수스의 탐욕 때문에 온 것이라면 샤한샤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돌아가게 해줄 것이다."
크라수스에게 6000명의 기병 지원을 약속한 동맹국 아르메니아의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크라수스에게 평지 대신 파르티아 기병들이 활약하기 어려운 아르메니아의 산악 지대를 통해 이동하라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이를 거절하고 메소포타미아의 사막 지대를 가로지르는 길을 선택했다. 이는 최단 루트를 통해 파르티아의 중심 도시 셀레우키아를 노리기 위한 목적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것은 크라수스에게 있어 최대의 오판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준비도 없이 폭염으로 가득한 사막지대를, 그것도 중무장한 보병이 통과한다는 건 너무나도 무모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크라수스가 진군해 오자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는 직접 아르메니아 공격에 나서는 한편, 수레나스를 파견해 크라수스의 침공에 대응하도록 했다.
파르티아의 침략을 받고 약속한 기병을 보낼 수 없게 된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크라수스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는 파르티아를 격파한 후에 곧장 아르메니아로 지원을 가겠다면서 이 문제를 크게 신경쓰지 않고 파르티아의 영토로 진군해 들어갔다. 역사적인 하란, 이곳에서 벌어진 위대한 카르헤 전투는 이렇게 시작된다. 로마군은 거대한 직사각형 진형으로 포진하였다. 보병들이 바깥 쪽에 줄지어 배치되고 그 안에 보급품 수송대와 기병대가 위치했다. 이는 파르티아의 대규모 기병대에게 측면을 잡히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진 배치였으나 기동성의 현저한 저하를 가져왔다. 수레나스는 처음에는 말갑옷을 씌운 정예기병인 카타프락토이를 이용한 공격 겸 탐색전을 시도했다.
로마군의 시야 범위에 접근한 카타프락토이들이 위장용으로 입고 있던 겉옷들을 벗어던지고 번쩍이는 갑옷을 과시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정면 돌격을 시도했지만 애초에 숫자가 1천 명을 약간 상회하는 규모밖에 안 되는 데다 로마군이 한치의 동요도 없이 굳건하자 카타프락토이들을 뒤로 물린 수레나스는 궁기병들을 내보냈다. 넓게 퍼진 궁기병들은 순식간에 로마군의 사방을 포위하고 활을 쏘기 시작한다. 크라수스 측의 경기병과 경보병들이 맞서 싸웠으나 엄청나게 쏟아지는 화살들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큰 방패와 갑옷으로 무장해 파르티아 기병의 화살 공격은 잘 막아낼 수 있었던 중무장 보병인 로마군단병들이 근접 전투를 위해 전진했으나 발빠른 궁기병이 느린 중보병들에게 잡힐리가 없었다. 이때 등 뒤로 활을 쏘면서 도망가는 파르티아 기병들 때문에 '파르티안 샷'이라는 말이 생겼다.
카르헤 전투에서 패배하고 살아남은 로마군은 도주를 감행했지만 이미 사막 깊숙히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파르티아 기병의 화살 과녁 신세가 되면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거의 4만에 달하던 로마군 중 2만 명이 죽고 1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크라수스와 그의 아들은 전사했다. 파르티아의 피해는 미미했다. 카르헤 전투의 패배로 로마는 상당한 인명 피해를 겪은 동시에 많은 군단기(軍團旗)를 빼앗겼는데 이는 로마에 있어 엄청난 굴욕이었다. 또한 삼두정치의 일원이던 크라수스가 전사하여 사라지면서 남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권력을 두고 본격적으로 대결을 벌이기 시작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공화정의 종말로 이어졌다. 1만 명가량의 패잔병을 이끌고 시리아에 도착한 카시우스는 몇 년 후 벌어진 파르티아의 공격을 잘 막아내서 키케로의 칭송을 들었다. 카르헤 전투에서 파르티아군은 로마군을 겁주기 위해서 거대한 북을 치고 시끄러운 음악 소리를 내면서 수많은 깃발들을 휘날리며 난리를 쳤는데 이 때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비단 깃발을 로마군이 보게 되어 로마에 처음으로 비단이 알려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