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3.22 나사 빠진 뚱보 아저씨
— 부재 : 악의보다 더 낯선 존재에 대하여
현대의 신축 아파트라는 공간은 물리적으로는 정돈되고 효율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지만, 그 내부의 인간 관계는 때로 차갑고 단절된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기성과 무관심, 그리고 일상의 피로가 축적된 결과, 공동체적 감각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최소한의 관계적 예의를 유지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윗집, 옆집, 아랫집과의 작은 인사, 명절의 간단한 나눔, 그리고 안부를 묻는 행위들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이는 거창한 의미라기보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연결을 유지하려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아래층에 신혼부부가 이사를 왔고, 돌이 지난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분유에서 멸균유로 바꾸는 시기라는 말을 듣고, 작은 선물과 함께 짧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영유아는 낯선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부모와의 관계 거리, 환경의 안정성, 그리고 상대의 태도에 따라 반응이 달라집니다. 일반적으로 일정 시간이 지나면 경계가 완화되지만, 저의 경우 체격과 인상 때문에 처음에는 아이가 강하게 경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부러 시선을 피하거나 가볍게 장난스러운 표현을 사용하며 긴장을 완화하려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아이는 점차 경계를 풀고, 다시 자신의 일상적인 상태로 돌아갑니다. 몇 차례의 눈맞춤과 미소가 오간 뒤에는, 오히려 먼저 다가와 무릎 위에 앉기도 합니다.
그때 아이가 보여주는 반응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계산이나 판단이 개입되지 않은, 즉각적이고 순수한 감응입니다. 부모들이 흔히 말하는 “아이들은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을 안다”는 표현은 단순한 감정적 수사가 아니라, 일정한 감응 능력에 대한 경험적 진술로 보입니다.
이러한 장면은 일상 속의 사소한 사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하나의 기준점처럼 작용합니다. 사회적 학습과 구조 속에서 형성된 반응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상태에서 나타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인간 사회 전반을 살펴보면, 상황은 다소 다르게 전개됩니다. 객관화, 정합화, 구조화, 의미화를 기반으로 본질과 이치를 탐구하려 할수록, 오히려 예상과는 다른 반응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노골적인 악의보다도, 이러한 방향 자체가 더 낯설고 불편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비교적 명확합니다. 악의적 구조는 소유, 쾌락, 권력과 같은 요소를 중심으로 작동하며, 이는 인간에게 직관적으로 이해되고 공유되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 욕망이라는 공통 기반 위에서 빠르게 확산될 수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반면 무형적 가치, 무소유적 태도, 그리고 이타적 쓰임을 중심으로 하는 방향은 즉각적인 보상 구조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 결과 현실과의 거리감이 크게 느껴지며, 많은 사람들에게는 비현실적이거나 비효율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쉽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해당 지향은 종종 “현실성이 없다”거나 “부질없는 시도”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면, 인권운동, 사회운동, 민주화 과정, 독립운동 등은 모두 당대에는 비현실적이거나 위험한 시도로 간주되었던 사례들입니다.
또한 공동체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소방관의 행동 역시 단순한 효율성이나 계산의 결과로 설명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행위들은 분명히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로 기능해 왔습니다.
자연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하나의 방향성을 보여줍니다. 나무는 자신을 소모하며 환경을 지탱하고, 연꽃은 오염된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를 정화하며 존재를 유지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을 넘어, 하나의 상징적 의미로 읽힐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스스로를 “나사 빠진 뚱보 아저씨”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사 빠짐’은 결핍이나 결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기심, 탐욕, 권위, 과도한 소유와 같은 요소들이 일정 부분 제거된 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결과 사회적 기준에서 볼 때 다소 어긋난 존재로 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타인에게 해를 덜 주고, 가능하다면 미약하게나마 이로운 방향으로 작용하는 존재로 남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아이들과 같은 비구조적 존재 앞에서 비교적 왜곡 없이 받아들여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아직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은 어떤 감응의 흔적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