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3.25 최형록 선생님과의 답문
— 존재의 해체와 쓰임에 대한 대화
1. 김용환 선생님의 삶을 바라보며
부제: 동경의 이유에 대하여
저에게 있어 김용환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단순한 인물에 대한 존경을 넘어, 하나의 삶의 방식이 지니는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쥐는 것’을 요구합니다. 이름과 성취, 그리고 타인의 인정을 붙들 것을 권하며,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경쟁과 비교의 구조 안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게 됩니다.
그러나 김용환 선생님의 삶은 그러한 흐름과는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선생님께서는 쥐는 삶이 아니라, 놓아가는 삶을 선택하신 분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소유의 포기를 넘어, 인간이 마지막까지 내려놓기 어려워하는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까지도 감내하려는 태도로 이어집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깊은 울림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산을 내려놓을 수는 있어도 체면을 지키려 하고, 명예를 포기할 수는 있어도 이해받고자 하는 욕구까지 내려놓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그러한 가장 미세한 욕구까지도 통과하려 하신 분처럼 느껴집니다.
이러한 모습은 단순한 자유의 차원을 넘어, 자기 해체에 가까운 용기로 다가옵니다.
물론 이러한 삶은 사회적 기준에서 비효율적으로 보이거나, 때로는 무책임하게 비칠 수 있습니다. ‘파락호’라는 표현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그 명칭은 단순한 낙인이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세상의 기준을 붙들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기준에서 벗어나려는 선택 속에서 발생하는 오해와 고립, 그리고 내적 압력을 스스로 감내하려는 태도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김용환 선생님은 하나의 완성된 답이라기보다는, 방향을 환기시키는 기준점과 같은 존재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나는 어디까지 내려놓을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 앞에서 선생님의 삶은 하나의 조용한 기준으로 떠오릅니다.
그 동경은 외형을 모방하려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밀도를 낮추고 진정성을 높이려는 내적 정렬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저에게 선생님은 세속적 성공을 보여준 인물이 아니라, 존재가 무엇을 끝까지 내려놓을 수 있는지를 몸으로 탐구한 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제가 나아가는 길을 비추는 하나의 등불처럼 작용하고 있습니다.
2. 최형록 선생님의 화답
최형록 선생님께서는 김용환 선생님의 삶을 불교적 관점에서 해석하시며, 무아(無我)와 무주상보시(無住相 布施)의 실천으로 이해하셨습니다.
특히 “飛鳥無跡(비조무적)”이라는 표현을 통해, 집착 없이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인상적으로 비유해 주셨습니다. 또한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이 되라”는 역설적 가르침과, 인간 사회의 자기 확인 욕구 및 집단적 동일시가 만들어내는 소외 문제를 함께 짚어 주셨습니다.
이와 더불어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다”는 고전적 비유를 통해, 삶의 덧없음과 그 속에서의 배움과 덕의 축적을 강조하셨습니다.
3. 이에 대한 저의 답문
최형록 선생님께,
짧은 시간이었으나 선생님을 뵈었던 기억 속에서, 다방면에 걸친 깊은 조예와 통찰이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한 깊이를 지니신 분이시기에, 부족한 제 생각 또한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실 수 있으리라 조심스럽게 기대해 봅니다.
먼저 깊이 공감하는 부분은 무주상보시에 대한 이해입니다. 나눔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태도를 통해, 존재의 오만과 집착을 해체해 나간다는 점에는 저 역시 동의합니다.
또한 인정 욕구와 자기 과시, 집단적 동일시가 오히려 인간을 소외시키는 구조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점 역시 동일한 문제의식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만 해체의 방식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집착을 내려놓고 멀어지는 방향을 강조하지만, 저는 그 과정 자체 또한 상당한 에너지를 요구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로 인해 오히려 고립과 소외라는 역설적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고려하고 있습니다.
Up
불가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깊이 존중하고 있습니다. 다만 무아의 개념에 대해서는 제 나름의 해석이 존재합니다.
저에게 있어 감사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인과와 흐름 속에서 형성되는 일종의 ‘부채 의식’에 가깝습니다. 이 부채 의식은 존재로서 감당해야 할 압력으로 작용하며, 그 과정 속에서 ‘나’에 대한 집착이 점진적으로 해체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쓸모없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저는 완전한 무용(無用)보다는 ‘이타적 쓰임’을 지향하는 방향에 조금 더 가까운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존재의 역사성과 관계 속에서 타자와 세계에 일정한 기여를 하는 ‘미물적 존재’로서의 역할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맥락화하려는 방향입니다.
아울러 인생의 덧없음에 대해서도 공감하지만, 그것이 곧 무가치함을 의미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짧기 때문에 더욱 귀한 기회일 수 있으며, 인간은 그 귀함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생각입니다만, 선생님께서 이러한 관점 또한 하나의 다른 시선으로 받아들여 주실 수 있기를 바라며, 인간다움의 일부를 내려놓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남깁니다.
항상 깊은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