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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시와 철학자
  • 타라고
  • 등록 2026-04-10 07:38:42




헤겔의 <정신현상학>' 정신(Geist)'장의 제 2부 '자기 소외된 정신'에는 성실한 철학자와 집시인 라모의 조카가 나누는 이야기가 나온다. <라모의 조카>(Le Neveau de Rameau)는 프랑스의 백과전서파를 대표하는 계몽주의 철학자 디드로(Diedrot)의 작품이다. 괴테가 독일어로 번역한 이 작품은 당대 독일의 지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헤겔은 이 이야기를 통해 단선적인 철학과 모순적인 현실의 차이를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자신이 지향하는 변증법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아래의 내용은 그 핵심을 소설로 구성해본 것이다.





Didrot의 <라모의 조카>



장소: 자욱한 담배 연기와 싼 위스키 냄새가 섞인 허름한 지하 술집.



등장인물:



박 교수 (철학자): 평생 도덕과 당위를 가르치고 앎을 추구해온 노철학자.



달호 (광대/집시): 천재적인 재능이 있지만 세속에 찌든, 냉소적인 떠돌이 음악가.



술집 구석, 박 교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앞에 앉은 사내를 노려보았다. 사내, 달호는 찢어진 셔츠 차림으로 비싼 코냑을 물처럼 들이키고 있었다.



"자네, 정말 구제불능이군." 박 교수가 혀를 찼다. "그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고작 부자들의 술상이나 봐주며 광대짓을 하다니. 자네에겐 '영혼의 존엄'이란 게 없나?"



달호가 낄낄거리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빛은 취해 있었으나,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다. "존엄? 아, 교수님. 또 그 재미없는 '도덕 교과서'를 펴시는군요. 존엄이 밥을 먹여줍니까? 아니면 이 코냑을 사줍니까?"



"돈 때문에 영혼을 팔지 말라는 걸세! 인간은 자신의 본분에 충실할 때, 즉 선(善)을 행하고 국가와 사회에 헌신할 때 비로소 고귀해지는 거야." 박 교수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평생 그렇게 살았고, 그것이 진리라 믿고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달호는 마치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식탁을 두드렸다. "선? 헌신? 하하하! 교수님, 그 고귀하신 말씀들은 다 어디서 주워들은 겁니까? 아, 물론 책이겠죠. 책 세상 바깥으로 외출해본 적이 없는 교수님이 달리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연구실 책상 위의 책만 책인가요? 이 세상 전체가 공부하고 해석해야 할 텍스트라는 생각은 안 드나요?" 달호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교수님. 솔직해집시다. 교수님이 대학 총장 앞에서 허리를 90도로 굽힐 때, 그건 존경입니까" 또 교수님이 열심히 연구재단의 프로젝트를 따오기 위해 노심초사할 때 그것은 학문적 호기심 때문입니까 아니면 연구비 때문입니까?"



박 교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례하군! 나는 학문의 발전을 위해 예우를 갖춘 것이고, 학문적 연구를 위해 프로젝트를 따려는 것 뿐이야. 이 프로젝트를 따와야 젊은 제자들이 연구할 수 있지 않나?"



"그게 바로 '광대짓'이라는 겁니다." 달호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나 교수님이나 똑같아요. 나는 부자의 지갑을 열기 위해 피아노를 치며 아양을 떨고, 당신은 권력과 학계의 인정을 받기 위해 '고상한 척'하고 '열심인 척'이라는 연기를 하지 않나요? 차이가 있다면 이거죠. 나는 내가 광대라는 걸 알고, 당신은 자신이 성자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오래 전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하지 않았나요?"



"말은 청산 유수지만 나는 자네처럼 비열하지 않아!" 박 교수가 소리쳤다. "나는 진리를 추구하네.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이야. 세상에는 지켜야 할 질서가 있요다고!"



달호가 위스키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나직이 말했다. "교수님 말씀처럼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보시오. 가장 고상한 척하는 귀족들이 밤에는 가장 음탕하게 놀고, 정의를 외치는 판사가 뒤로는 뇌물을 챙기지. 선생들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이야기를 모르오?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는 이 뒤죽박죽인 세상... 이게 진짜 현실 아닙니까?"



"그건 타락이야. 바로잡아야 할 모순이라고."



"아니, 그 모순이 바로 생명이지!" 달호가 갑자기 일어나 왈츠를 추듯 비틀거리며 돌았다. "교수님의 그 반듯한 논리는 시체실에나 어울려요. 뻣뻣하고, 차갑고, 죽어있지. 하지만 나의 이 비열함, 이 이중성, 이 혼란... 여기엔 생생한 피가 흐르고 있소! 나는 부자들을 경멸하면서 동시에 숭배합니다. 권력도 그렇고 지식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세상을 비웃으면서도 세상의 단물을 빨아먹어. 나는 모순덩어리야. 그래서 나는 당신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정신'이란 말이오."



박 교수는 말문이 막혔다. 저 타락한 광대의 궤변이, 이상하게도 자신의 반듯한 논리보다 더 뼈아프게 가슴을 찔러왔다. 교과서 속의 도덕은 현실의 진흙탕 속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노자가 그렇게 강조했나? 和光同塵(화광동진)이라고. 정작 내가 입으로는 가르치면서도 그 말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나?



달호가 박 교수의 굳은 표정을 보며 짓궂게 윙크했다. "교수님. 당신의 그 '성실한 의식'은 아름답지만, 바보 같아요. 마치 악보대로만 연주하느라 관객이 다 떠난 줄도 모르는 연주자 같지. 하지만 나는... 나는 불협화음이야. 찢어지고 갈라진 소리를 내지. 그런데 말입니다..."



달호가 텅 빈 잔을 박 교수 앞에 쾅 내려놓았다. "그 찢어진 틈새로만 진짜 세상의 빛이 들어온다는 생각, 안 해봤소?"



술집의 소음이 다시 그들 사이를 채웠다. 박 교수는 자신의 넥타이가 목을 조르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평생 쌓아온 도덕과 지식의 성(城)이 눈앞에 있는 저 천박한 광대의 웃음소리 한 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달호는 비틀거리며 술집 문을 나섰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은 처량했지만, 동시에 기묘할 정도로 자유로워 보였다. 박 교수는 홀로 남아, 처음으로 자신의 '정직함'이 사실은 세상으로부터 도망친 비겁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낯선 의문에 휩싸였다. "도대체 뭐야? 지금까지 나는 뭐를 찾아 평생을 연구해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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