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238185&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빨치산의 태평소 소리 좋아했던 미군, 국악의 전도사가 되다[이희용의 월드코리안 12] 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민족·국제 이희용(hoprave)▲가야금 타는 해의만만년의 해...
바투는 우랄 산맥을 넘어 먼저 볼가 불가르인을 공략했다. 그리고 1237년 뜻밖에도 북쪽에서 돌연히 나타나 러시아 동부의 랴잔 공국을 들이쳤다. 랴잔의 병사는 물론 온 시민이 나서서 끝까지 항전했으나, 5일간의 전투 끝에 도시는 함락되고 시민들은 몰살당했다. 이것 뿐 만 아니라 몽골군은 전략도 다양하게 구사했다. 예를 들어 야전에서는 보조부대를 진의 중앙에 두고 양측 방에 활을 가진 주력부대를 배치했다.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역사박물관의 라마불교 불상,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적병이 돌격해 들어오면 중앙이 후퇴하면서 양측 방에서 적에게 화살로 공격했다. 적병은 처음에는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나 곧 함정에 빠져들었음을 깨닫게 된다. 몽골군은 기동성이 뛰어난 기병으로, 중장 기마대와 경장 기마대를 함께 운용했으며 군대를 10명, 100명, 1,000명 단위로 편성하고 지휘부에는 참모부를 두는 등, 잘 조직되어 있었다. 또 정찰과 첩보공작을 조직적으로 전개했고, 투석기와 파벽 기를 앞세운 공성 술도 뛰어났다.
이는 몽골군이 적의 용기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했지만 자비심을 베푸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칭기즈칸이 “후회는 동정의 열매” 라는 형식으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다음 공격은 블라디미르 대공국이었다. 1237~1238년 사이의 겨울에 몽골군은 얼어붙은 강을 빠른 속도로 건너다니며 당시 러시아 최강의 군대를 가지고 있던 대공국의 여러 도시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아마도 역사상 러시아를 겨울에 침략하여 성공한 유일한 사례로 나타나고 있다. 이어서 야로슬라블과 트베리, 볼가 강변의 여러 도시가 몽골군에게 초토화되었다.
노브고로드를 비롯한 북서부 지역만은 유일하게 화를 면했다. 얼음이 풀려 그 일대가 늪지대로 변하면서 몽골군이 전진을 포기하고 초원지대로 진격했기 때문이다. 초원지대를 평정하며 잠시 재정비를 마친 몽골군은 남부 러시아로 공격해 들어갔다. 1240년 키예프가 점령되어 주민이 모두 죽거나 노예가 되었다. 몽골군은 이어 갈리치와 볼린을 정복하고 러시아의 국경을 넘어 폴란드와 헝가리로 공격해 들어갔다. 폴란드에 침입한 몽골군은 계속 서진하여 슐레지엔의 발슈타트 전투에서 독일 기사단을 크게 격퇴했고, 헝가리로 진출한 몽골군의 선발대는 아드리아 해안까지 진격했다.
이로써 전 유럽이 몽골군에 대한 공포로 긴장했고 결국 서유럽은 몽골군을 대비하기 위해 군사적인 전략과 성채 보수에 들어갔다. 유럽을 초토화 중인 상황에서 몽골 본국의 카라코룸에서 오고타이 칸이 사망했다는 전갈이 왔다. 바투는 군대를 초원지대로 불러들여 1243년 볼가 강변의 사라이(Sarai)를 수도로 하여 킵차크 칸국을 건국했다. 이후 온 러시아는 킵차크의 칸에게 항복하여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러시아 인들은 몽골의 러시아 지배를 굴욕적인 표현을 서술하여 타타르의 멍에(Tartar-Mongol yoke)라고 불렀다.
타타르(Tartar)라는 말은 본디 몽골의 한 부족 명칭이었으나, 러시아에 그 말이 전해지면서 "지옥" 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타르타로스(Tartaros)와 겹쳐져 몽골족을 총칭하는 말로 사용되었고, 그 후 다시 투르크계 민족들까지를 포함하는 유목 기마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몽골의 침략 과정과 지배 하에서 러시아의 문화는 크게 파괴당하고 사회와 경제는 큰 굴절을 겪는 약 240여 년의 몽골 식민 지배 시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