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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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상인의 선두는 포르투갈이었다. 1511년 포르투갈은 인도의 고아를 점령하여 아시아 경략의 근거지로 삼은데 이어 중계무역의 중심지인 믈라카를 점령하였다. 1557년 일본의 다네가시마에 진출한 포르투갈은 마침내 마카오에 교역지를 설립하였다. 규슈의 다이묘가 나가사키를 예수회에 할양하자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에 걸쳐 포르투갈은 남중국해의 무역을 장악했다.

베트남 하노이 밧짱 도자기 마을의 실크로드 도자기,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명나라의 해금정책 완화 혜택을 입은 것도 포르투갈 상인이었다. 포르투갈 상인은 조총, 화약, 중국의 생사와 견직물을 일본에 팔고, 일본이 결제한 은으로 중국의 견직물이나 도자기를 사서 베트남을 경유하여 유럽에 수출하였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선교사 출국 조치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상인은 일본에 남도록 허락되었다. 16세기 말에는 포르투갈의 영향이 일본 사회 전반에 퍼지면서 예술, 의복, 음식, 의학, 과학, 전쟁에 대한 일본인의 사고에 영향을 미쳤다.
뒤이어 진출한 스페인은 1571년 필리핀 제도에 기지를 건설하고 마닐라를 수중에 넣었다. 마닐라는 ‘갈레온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명나라의 상인은 비단, 면, 도자기를 가져와 스페인 상인이 아카풀코에서 가져온 은과 교환하였다. 16세기 말부터 네덜란드와 영국 상인이 진출하였다. 네덜란드 상인은 향신료 산지인 말루쿠 제도의 지배권을 포르투갈에서 탈취한 후, 일본에 진출하여 규슈 해안의 히라도 섬에 교역 기지를 설치하였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격파하고 대만 남부를 확보하여 40여 년 동안 근거지로 삼았으며, 1641년에는 마침내 말라카를 점령하였다. 가톨릭 선교를 앞세운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박의 기항이 금지되고 영국이 철수하자 네덜란드는 일본에 기항할 수 있는 유일한 유럽 국가가 되었다. 네덜란드인은 베트남 하이퐁과 다낭, 호이안 일대 등에 머물며 중국과 교역하였다. 17세기 중엽 바타비아, 말라카, 그리고 말루쿠 제도 대부분을 장악한 네덜란드는 마침내 동남아시아에서 베트남의 실크와 자기를 거래하여 유럽에 비싸게 팔게 되면서 해양 상업의 지배자가 되었다.
동중국해의 제해권은 거의 사라졌고, 후추 산지의 통제권을 잃은 인도네시아 지역도 점차 쇠퇴하였다. 활동 근거지를 자바 섬의 바타비아에 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전체 무역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베트남과 대만,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에도 세력을 확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