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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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사크는 15세기 말 부터 20세기 초까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동유럽에는 발트 3국과 폴란드에까지 분포했던 군사 집단이다. 그러한 연유로 인하여 코사크의 구성원 출신 국가는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었다. 15세기 말 우크라이나의 중앙 지역을 가로지르는 드네프로 강을 중심으로 한 자포리자 지역에서 자포리자 코사크가 처음으로 결성되었다. 16세기에는 돈 강 유역을 중심으로 돈 카자크가 결성되었다. 15세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대에 처음으로 등장한 자포리자 코사크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신으로서 출발하였다. 16세기, 17세기, 18세기에 정치적, 군사적 역량을 강화해 나가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모스크바 대공국, 크림 칸국의 세력에 저항해 나갔다.

우크라이나 드네프르 강 일대에서 전통 민속축제로 벌어지는 코사크 축제, 출처 : UKRINFORM
특히 1648년부터 1657년까지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에 저항하면서 일으킨 흐멜니츠키 봉기는 자포리자 코사크의 군사적 영향력을 입증했다. 초대 헤트만(Hetman)이었던 보흐단 흐멜니츠키 봉기의 성공으로 잠시 동안 카자크 헤트마네트(Hetmanet)라는 이름으로 독립하기도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붕괴되었다. 1654년 페레야슬라프 조약으로 우크라이나의 대부분 지역이 모스크바 대공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이 때부터 코사크는 러시아의 통치를 받았다. 1649년부터 1764년까지 존재했던 자포리자 카자크 출신 지도자가 카자크 수장국의 수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을 입증했다. 18세기 말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의해 해산된 뒤에는 쿠반 강 유역에 정착했다.
현재 코사크의 출현에 관한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고 있다. 역사학자인 샴바로바(В. Шамбарова)와 구미료바(Л. Гумилёва)의 견해에 따르면, 코사크 인들은 몽골-타타르 군대의 침입 후에 크라스노(Касог)와 브로드니크(Бродник)이 통합됨에 따라 몽골-타타르 세력이 투르크계 민족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의 계산 하에 형성되었다. 이들 투르크계 민족들 중 카소그(Kasog) 인들은 스키타이와 사르마트가 지배하던 당시 카프카스의 민족으로 이들은 스키타이와 사르마트가 사라진 이후, 아르메니아의 지배를 받으며 긴 시간을 카프카스에서 영속하고 있었으나 투르크계 민족의 진출 등으로 이들과 혼혈하여 10세기까지 남아있었다. 이들은 이슬람 세력이 카프카스에 침투하고 그들의 세력에 벗어나기 위해 10~14세기 사이 쿠반(Cuban) 강 하류 지역에 소규모로 여러 차례 이주하였었다.
한편 당시 쿠반 강과 돈 강 지역에 널리 분포하던 민족들은 투르크-슬라브의 혼혈 민족인 브로드니크(Brodnick) 인들이 존재했다. 비록 이들 브로드니크 인들이 언제 생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 12세기에 돈 강 하류 지역으로 대규모 부락을 이루면서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 당시 브로드니크 인들은 키예프 루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몽골인들 침공하여 카프카스에서 쿠반 강에 이르기까지 정복하자 이에 카소그 인들은 북쪽으로 피난을 가게 되고, 돈 강 유역의 브로드니크 민족과 융합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들의 민족 명칭들을 계승하여 카자크(Kазак), 혹은 코사크라고 불렀다. 그때 브로드니크 인들은 몽골 측에 투항하여 칼가(Калка)강에서의 전투에서 키예프 루스를 격퇴하였다. 그러한 덕택으로 몽골인들의 보호를 받게 된 코사크 인들은 드디어 최초의 조직이 정비되었고, 이어 타타르 인들에 의한 대대적인 복속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몽골군은 피정복민인 코사크 인들이 자신들에게 협조한 대가로 그들의 종교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하였고, 또한 몽골군 중에는 코사크 군에 투항한 자들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코사크 인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사파이스코-포돈스코에(Сарайско-Подонское) 교구도 있었다. 이후 킵차크 한국의 분열 후에 킵차크 한국의 영역에 남겨진 코사크 인들은 자신들의 군대 조직을 보존할 수 있었고, 그때 이들은 분열된 제국의 일부분이었던 노가이 한국(Ногайская орда)과 크림 한국(Крымское ханство)으로부터 독립하였으며, 당시 키예프 루스를 침입했던 모스크바 공국으로부터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1380년 코사크 인들은 드미트리 돈스코이에게 “돈 강의 성모(Донской Богоматери)” 라는 이콘을 바치고 쿨리코보 전투에서 마마이(Mamay)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였다고 전해진다. 카자크 수장국(Гетьманщина), 혹은 자포리자 카자크(Вiйсько Запорозьке)는 1649년에서 1764년 사이 드네프르와 시베리아 지역, 대략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에 존재했던 코사크 국가이다.
이들은 18세기 후반에 소(小) 러시아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흡수되었다. 카자크 수장국은 우크라이나 카자크의 헤트만(수장)인 보흐단 흐멜니츠키(Богдан Хмельницький)가 1648년~57년의 봉기를 통하여 건국하였다. 1654년, 카자크 수장국은 페레야슬라프 조약을 통하여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대항하는 군사동맹을 맺었다. 당시 러시아 차르는 폴란드와 전투를 벌이는 대가로 코사크의 독립을 보장했지만, 1667년 안드루소보(Andrusovo) 조약에서 카자크를 배제하고 드네프르 강을 경계로 수장국 영토를 양분했다. 이를 폴란드와 러시아가 각각 취함으로써 카자크와의 약속을 저버리게 된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에서는 카자크 당파들끼리의 내전이 17세기 말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를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폐허 시대(Эпоха руин)라 불린다. 18세기 들어 수장국의 영토는 서부 우크라이나로 제한되었고, 수도 바투린(Baturin)은 대(大) 북방전쟁 때 러시아 군대에게 약탈당했다.
1764년 예카테리나 2세는 볼가 카자크와 우크라이나 카자크의 자치권을 부정하여 수장국 영토가 키예프 총독부와 소러시아로 분할됨으로써 수장국은 멸망하게 된다. 이 때 카자크 수장국의 유민으로써 그대로 드네프르 강 유역에 남은 코사크족은 현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선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