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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알바니아에서 베라트 답사 당시 이야기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21 02:16:35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던 부촌 같은 마을이 이제는 세계적인 명물이 되었다. 실제 이 부촌들은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알바니아까지 도망온 기독교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후 성이 축조되면서 기독교 공인 이후 다수 기독교인들이 마을을 떠났고 이 지역은 비잔틴 제국에서 격리된 자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베라트는 알바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서 최초의 주거 흔적은 B.C 2,600~B.C 1,8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에서는 B.C 7세기 및 6세기의 도자기도 발견되었다. 베라트 사람들은 처음에는 일리리아(Illyrians) 인으로 불렸다가, 나중에는 아르베(Arber), 최종적으로 알바니아 인으로 불려졌다.



알바니아의 베라트의 풍경,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훈족, 아바르의 침입을 격퇴했고 비잔틴의 영토가 되었지만 이후 오스만투르크가 장악하고 난 후 터키인들이 대거 이주해왔다. 베라트는 다른 알바니아 도시와는 다르게 터키와 가장 친근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내가 머물고 있었던 베라트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이 건물이 만들어진지 200년이 넘었고 그때도 케레이 사라반과 같은 숙소였다가 후일 알바니아 독립운동가들이 이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서 독립투쟁을 하루하루 생각하며 살았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그런 사연이 정말 존재한다면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가지는 자부심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성 밖에 나가보니 나가는 길이 있고 왠 동양인 무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었다. 나야 일본어가 통하니까 자연스럽게 인사하게 되었다. 이들이 올라온 곳은 서쪽 게이트 방향으로 올드타운에서부터 시작한게 아니라 올드타운 가기 직전 쉽게 올라올 수 있는 곳이 있었다 한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쪽으로 올라왔으면 이 개고생은 면했을 것이라는 후회감이 들었다. 그래서 정보력은 타지에서 생명이다. 이걸 깊이 인지하는 것이 중요한데 나는 베라트 성의 역사적 정보 외에는 아는게 없었다. 


역사적인 정보에 의하면 오스만 군대들은 1415년에 남부 알바니아에 주둔지를 마련해놓았으며 1431년에는 알바니아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443년 알바니아의 국민영웅인 스칸데르베그 주도의 장기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1479년까지 지속되며, 당시 술탄 무라트 2세와 메흐메트 2세가 이끌던 주요 오스만 군대들을 물리쳐냈다. 스칸데르베그는 알바니아 지역의 군주들을 통합하고, 대부분의 지역에 중앙 권력 체계를 도입해내며, 알바니아의 군주 자리에 오르기에 이르렀다. 그는 또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범유럽 연합을 구성하려 시도하기도 하였다. 


터키인들은 이탈리아와 서유럽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알바니아 지역을 발판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고, 이에 따라 여러번 재정복 시도를 하였으나, 매번 스칸데르베그에 위해 저지되었다. 당시 그와 오스만 제국과의 싸움은 유럽 지역에서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었으며, 이는 나폴리, 베네치아, 라구사 그리고 교황으로부터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한편 오스만 제국이 알바니아에 진출하며, 이슬람교가 제3의 종교로 알바니아에 유입되었다. 이 시기동안 대규모의 알바니아인들이 기독교 유럽 국가들로 이주하였으며, 특히 이탈리아로의 이주가 다량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이슬람교로 개종한 알바니아인들은 보스니아인과 더불어 오스만 제국 내에서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발칸 지역에 대한 정책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베라트는 비잔틴 제국 시기에 쌓은 산성을 중심으로 오스만투르크의 이슬람 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공식적으로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이슬람 국가로 인정받은 곳이 알바니아이니만큼 이슬람의 색체가 가장 강한 곳이다. 이 때 여름이었는데 온도 43도와 44도를 왔다갔다 했을 정도 쪄죽는 날씨였고 습도가 80%를 웃도는 날씨였다. 게다가 게스트하우스는 에어컨 없이 선풍기 한 대로 방 하나를 돌리고 있었다. 완전 최악이었다. 


무엇보다 밤에는 33도와 34도를 왔다갔다 하는 열대야로 인해 잠을 설쳤고 찬물 샤워를 무려 6번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래도 오스만투르크와 비잔틴 제국의 흔적을 찾아 이곳에 왔는데 오스만투르크가 투르크의 기치를 세우고 이곳에서 발칸을 통치하기 위한 기지를 마련했다. 따라서 도시의 미관을 더욱 돋보이고 이곳에 자리한 기독교인의 세금을 걷기 위해 벽을 색깔을 하얀색으로 규정한 것이 베라트와 지로카스트라에 하얀 집이 존재하게 된 이유이다. 쪄죽는 지옥속에서 높이 500m의 산성까지 올라가느라 체력도 바닥이었던 당시에는 열사병 때문에 질질 짰던 그 때 생각하면 지금도 구역질 나올 지경이다.


그러나 작고도 예쁜 마을인 베라트는 ‘1,000개의 창을 가진 마을’ 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만큼 그 때의 상황을 추억으로 즐길 수 있을듯 싶다. 사진 속의 요새와 비잔틴 양식의 교회등은 마치 13세기로 돌아간듯한 느낌을 준다. 베라트 시내에서 대학교 인근까지만 보고 더 이상 볼꺼 없을거 같아 베라트 성에 가려고 이동했다. 그런데 베라트 성은 산성(山城)이라 꽤 높은 고지에 있었다. 어느 정도 괜찮거니 했는데 40도가 오르내리는 여름이고 경사가 매우 가팔랐으며 차도 올라가는 곳이라 길이 돌길이어도 미끄러워서 다칠 가능성도 있어 매우 신경을 써야 했다. 올라가다 지름길이 보였다. 필자는 이 길로 가면 큰 힘을 들이지 않겠다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경사는 엄청 가파르고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40도 넘는 더위에 높은 경사에 아주 죽을 맛이었다.


순간 필자는 지름길 선택 한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방향을 잡은건 끝까지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더위 속에 에너지 두 번 낭비다. 거의 정상에 다다랐을 때 너무 힘들어서 속에서 올라와 우엑! 했다. 그만큼 탈수도 심해 수분을 공급하지 않으면 탈진할 것 같았다. 베라트 성 서문에 안착했을 때 소박한 형태의 교회가 눈에 띈다. 밀라노 칙령 이후 비잔틴 때 만들어진 교회인듯 싶다. 안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문이 잠겨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베라트 성이 최초로 축성된 곳을 찾았다. 이곳은 4세기 중엽 돌을 이용해 요새 형태로 성을 쌓았으며, 이 요새 안에 일리리아 인들의 마을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 터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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