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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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개국과 더불어 당시 로마노프 왕조 시기의 사회에 대해 연구한 결과 몇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Российский императорский дом во время опубликования Акта о престолонаследии: «Портрет Павла I с семьёй». Худ. Герхард фон Кюгельген
첫째, 본래 러시아는 드미트리 돈스코이 공후 이후, 몽골-타타르의 지배에서 벗어나자마자 폴란드-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때 다량의 슬라브 인들이 귀족으로 대두되었는데 당시 슬라브 인이 다스리는 왕국 체제에서 모스크바 대공국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왕조가 폴란드 인이 건국한 왕조였다. 따라서 당시 러시아의 슬라브계 귀족들은 폴란드 인이 많았으며 실제 모스크바 대공국을 이어받은 모스크바 슬라브 인 귀족들은 몇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때 슬라브 인들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단행했고 결국 모스크바 대공국의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젬스키 소브루가 열리며 시민들의 회의로 인한 왕정이 탄생했던 것이다. 로마노프 왕조라 하면 차르의 전제 정치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로마노프 왕조의 생성과 초창기에는 차르의 전제 정치가 아닌 시민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정(市民政)이었다.
둘째, 다수의 슬라브 인이 이합집산하여 통치하는 과정에서 차르 혼자 독단적으로 정치적 문제를 결정하는 일이 많았다. 이는 당시 슬라브 인의 80% 이상이 문맹인에다 그 동안 이어졌던 수동적인 지배 형태에 익숙해져 있었다. 따라서 차르의 독단에 대한 제지가 강력하지 못했고 결국 시민 주권에 의해 건국되었던 로마노프 왕정의 젬스키 소브루는 그 명색이 퇴색되었고 이와 같은 시민 주권의식의 약화는 차르의 전제화로 이어졌다.
이어 정교회에 관한 부분도 마찬가지로 로마 카톨릭이나 동유럽 정교회들과 교류가 적은 탓에 고립되어 있는 종교 집단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열세적인 상황에서 차르의 독재화에 대하여 이를 제지할 수 있는 경쟁적인 세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점들로 인하여 차르의 전제 정치는 더욱 강화되었고 러시아의 민주화가 후진적인 성향을 띄게 되었다.
셋째, 러시아의 주 경제는 반농반목이었지만 점차 기후가 낮아짐에 따라 식량의 중요성이 더해져 농업에 치중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개간하게 될 땅이 많아짐에 따라 소수의 귀족들이 넓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기반이 약한 농민들의 사유재산이 점차 귀족들에게 넘어가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면서 농민들은 자연히 귀족들의 소작농이 되었고 이들 소작농들은 이른바 농노라 불리는 농사짓는 노예가 되어 러시아 경제를 책임지게 된다.
실제 이러한 농노들은 귀족들의 억압에 토지 강탈로 인하여 집안 경제 전체를 귀족들에게 맡기게 됨에 따라 경제적으로 위에서 아래에 이르는 피라미드식 구조를 가지게 된다. 결국 이러한 농노제는 다수의 농민들을 격분시켰고 근대 러시아의 농민 반란이 잦은 원인이 되었다.
이 세 가지의 결론을 보면서 이와 같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형태로 볼 때 공산주의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를 안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사회 문제들은 공산주의가 태동하여 러시아에 자리 잡게 되면서 일시적으로 해소되는 듯 했으나 그 문제들은 더욱 심화되었고 오늘 날까지 러시아가 발전하지 못하고 후진적인 경제, 사회적인 형태가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라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