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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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포로제 카자흐 세력의 지도자는 폴란드 정부에 등록된 상류층 카자흐의 아타만(Ataman, 수령), 보그단 흐멜니츠키(Bogdan Hmelniski)였다. 이러한 농민 반란은 대다수의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지지했다. 이는 곧 우크라이나 독립전쟁으로 이어졌으나 1651년 폴란드 군에 패하고 대부분의 군사를 잃게 된다. 이에 흐멜니츠키는 모스크바 로마노프 왕조에 군사적 원조를 요청했다. 이에 차르 알렉세이는 우크라이나의 카자흐를 러시아의 보호 하에 두기로 결정했다. 이는 곧 폴란드와의 전쟁을 의미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폴란드와 비교했을 때 군사적인 부분에서는 절대적인 열세였다. 그러나 알렉세이는 폴란드와의 전쟁을 각오해서라도 우크라이나의 카자흐를 보호하고 우크라이나를 정복하는 것을 밀어 붙였다.

우크라이나 평원을 휩쓸던 자포로제 코사크족,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이리하여 1654년 우크라이나 카자흐는 모스크바의 차르와 군신 협정을 맺었다. 이후 이러한 우크라이나의 문제는 러시아와 폴란드의 전쟁으로 변화되면서 두 나라는 무려 12동안 장기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전력적으로 열세였던 러시아는 초반 열세를 뒤집고 폴란드와 대등하게 전쟁을 벌여갔다. 12년 간 장기전에 지친 양국은 1667년 휴전협정을 맺고 키예프를 포함하여 드네프르 강 동쪽 우크라이나 영토가 러시아 령으로 편입되었고 서쪽 벨라루스 지역은 폴란드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한편 러시아 정교회도 큰 진통을 겪었다. 모스크바 총주교 니콘(Nikon)이 신앙심 깊은 차르 알렉세이의 후원 하에 전례 개혁에 착수했다. 1654년 주교회의는 그리스 관행에 따른 니콘의 전례 개혁을 승인했다.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은 사제 아바쿰(Abacum)을 중심으로 한 라스콜니키 파(Rascolniki, 분리파, 고(高) 의식파)를 형성했다.
알렉세이는 스테판 보니파티예프(Stefan Bonipatiev) 신부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의 도덕성을 회복하려는 열성신도의 운동에 전적으로 동의하였고, 루시 전역은 일대 정신적 부흥을 일으켰다. 이 때 차르가 비호한 니콘이 총대주교로 선출되자 분란이 일어났다. 신임 총대주교는 1653년 십자성호를 긋는 방식(두 손가락이 아닌 세 손가락으로 긋는 것)을 포함한 교회 의식(Ritual)을 새로운 그리스 교회식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다. 서유럽 장로회와의 교류는 보수적인 루시 정교도의 심기를 건드렸으며, 많은 이들이 그리스 예식 수용을 거부하며 총대주교에 저항하였다. 그 동안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전례를 점차 변화시켜 왔으나 루시 정교회는 아직도 10세기 개종 당시 전수 받은 전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많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이 같은 정책에 반대, 루시 교회의 전통은 다른 지역교회들의 전통보다 훨씬 우월하므로 절대 바뀌어선 안 된다고 하였다.
특히 1666~1667년의 공의회에서는 교권의 강화를 둘러싸고 차르 알렉세이와 대립한 니콘 총주교가 파면 당했다. 이로써 러시아 정교회의 교권이 완전히 차르의 권력 아래로 떨어졌다. 여기에서 파문당한 라스콜니키 분리파는 차르의 권력에 저항하는 정교회와 함께 러시아 국가에도 저항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러한 저항은 곧 차르의 진노를 불러왔고 철저한 박해를 통해 분리파의 거점들은 분쇄되고 지도자 아바쿰은 1682년에 화형당했다. 그러자 분리파는 분신으로 저항하여 2만 이상의 신도가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교세는 회복되지 않고 더욱 차별과 동시에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교회와 국가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우랄이나 시베리아 등 벽지로 도피하여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가게 된다. 이러한 사태들은 교회의 분열과 더불어 러시아 정교회의 위상은 크게 약화되어 차르의 절대적인 통치를 받게 된다.
당시 돈 강과 볼가 강 유역에서는 반역의 기운이 일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카자흐가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지역에 도주했던 농민 들이었다. 이러한 농민들의 정신적 지도자가 나타났는데 전설적인 영웅인 스텐카 라진의 등장을 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