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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왕정 시대의 원로원과 사회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21 13:05:43

로마의 국왕은 10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과 상의하여 공무를 처리하였는데 원로원은 100개의 로마 유력 부족의 수장들이 모여 결성한 집단으로 오늘날의 시 대표, 혹은 시 의원의 시초라 볼 수 있다. 이 원로원은 후일 공화정 시기에 300명으로 구성되어진 로마 원로원의 모태가 된다. 이 로마 원로원은 현재 국회 급으로 여겨지며 단순 시(市) 형태의 로마가 확장되면서 확보한 영토의 귀족 대표들이 모여 초창기 공화정 원로원을 구성한다. 로마의 5대 왕으로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Tarquinius Priscus)는 전설적인 앞선 왕들에 비해 실제 첫 기록 등장하는 국왕으로 그는 본래 로마인이 아니라 그리스인과 혼혈인 에트루리아의 유력자 집안 출신이었다. 물론 혼혈이라는 부분 때문에 본국에서 자신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로마로 건너와서 선거 운동을 벌여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었다.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 의 페이스북

그런데 이후 7대까지의 왕이 모두 에트루리아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에트루리아가 로마를 지배한 시기로 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로마를 특정 부족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족이 돌아가며 국가 체계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로 보기도 한다. 특히 로마의 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는 로마의 정치제도를 확립시키고 세르비우스 성벽을 축성하면서 로마 시(市) 자체의 기본 윤곽을 형성시켰다. 7대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Tarquinius Superbus)는 기존의 국왕이었던 자신의 장인인 세르비우스를 살해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 인물로, 원로원을 무시하고 자신이 독단적으로 절대 왕권을 이용해 통치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던 상황에서 로마 왕정이 공화정으로 바뀌는 중요한 전기가 여기에서 마련이 된다. 

수페르부스가 이탈리아 남쪽 타란토 지역으로 군사 원정을 벌이는 동안 수페르부스 왕의 아들인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Sextus Tarquinius)가 루크레티아(Rucretia)라는 명문 귀족의 부인을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의 발단은 루크레티아의 남편과 섹스투스가 누구의 부인이 더 아름다운지 미모를 두고 내기를 하였고 따라서 두 젊은이가 자신의 부인을 서로에게 보여 주었는데, 이 때 루크레티아의 모습을 본 섹스투스가 그녀에게 반해 며칠 뒤 남편이 없는 사이에 집을 방문, 잘 대접 받은 뒤 그날 밤 침실로 침입하여 단도를 가지고 협박해 강간한 것이었다.  이후 섹스투스가 떠난 뒤, 루크레티아는 자신의 종으로 하여금 전장에 나가있던 남편과 시아버지, 그녀 집안의 친척이자 왕의 사위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Lucius Junius Brutus)를 불러들여 이 사실을 알려 복수할 것을 당부했다. 이후 그녀는 자결을 했는데 이에 분노한 브루투스가 로마 시민들을 선동하여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를 추방하게 되면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그렇지만 250년 동안 존재했던 왕정이 앞에서 언급한 강간 사건으로 인해 전복되고 공화정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쉽게 설득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강간 사건과 일련의 복수극으로 인한 시민들 선동, 그로 인한 정권 교체는 실제 역사가 아닌 신화 속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체제가 바뀔 때, 왕정이 매우 타락하고 폭압적이었기 때문에 바꾸려고 일어섰다는 일종의 합리적인 정당성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왕정은 로마인들에게 자신들의 자유를 강탈한 악랄한 정부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했다. 후일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Imperator)으로써 황제가 되려고 한다는 것에 로마 시민들이 이를 매우 두려워했고 이것이 그에 대한 암살로까지 연결되기도 했을 정도로 왕정은 로마 시민에게 있어 강한 트라우마로 남았던 것은 분명하다.  

실제 역사로 볼 때 그리스계 도시와 마찬가지로 왕정이 붕괴되고 귀족에 의한 공동 통치로 넘어가 시민들에 의한 민주 정권 수립이라는 수순으로 점차 민주정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처럼 민주정 화되는 것은 도시 국가 형태를 가진 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고 보기도 하는데 도시 국가의 사활이 달린 전쟁을 시민군이 수행하였고 그로 인해 시민들의 권력과 발언권이 점점 강해졌기 때문에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상당히 단정적인 논조로 중동 지역과 페르시아, 이집트와 같은 절대 왕정이 성행한 지역과 대조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특정 국가의 시기에 따른 정치 체제가 이처럼 단순하게 정해지는 일은 흔치 않다. 지역에 따라 도시국가나 영토국가가 모두 나타나거나 애매한 형태로 변질되어 나타나기도 쉽고 이것이 정치 체제와 직결된다는 보장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해 정확한 설명이라 보기 어려운 내용도 많다. 

한편 페르시아나 이집트 같은 곳은 넓게 퍼진 평야 지대를 기반으로 삼아 도시 국가가 아닌 하나의 큰 국가를 형성하여 넓은 일대를 전체적으로 관리하였고 이를 지배층이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명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세습 왕조가 등장해도 유지가 가능한 경우는 상대적으로 많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 이탈리아와 같은 지역은 대규모 평야 지대보다는 하나의 도시가 그들만의 정부가 있는 도시국가들이 많이 나타났는데 산과 분지들로 이루어져 통합되기 어려웠고 수많은 민족들이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민족으로 통합되어지지 못하고 섞여 살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지역의 도시국가에서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도시의 농민들을 소집하여 시민군을 구성한 뒤 전장에 나가 전투를 수행했고 전쟁이 끝난 뒤 병사들은 농민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었다. 

로마도 마찬가지로 농민들이 곧 군인이었던 세계였고 이들은 무장을 자체 조달하면서 스스로를 무장했다. 물론 어떤 국가든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전쟁에 나서는 시민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국가의 흥망에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지배층에게 전리품의 분배와 같은 그들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었다. 이는 하나의 왕조가 농민들을 지배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의 이유로 많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물론 정치 체제를 불문하고 시민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에 대해 발언권을 가진 상황은 당시 고대 그리스 문화권의 모든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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