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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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원로원과 인민으로 나타나는 로마 공화정은 고대 로마 시대에서 B.C 510년경 왕정을 폐지하고 이후 450여 년간 로마 정치를 이끌었던 공화정 정체와 그 정부를 지칭하고 있다. 로마 공화정은 권력을 분리하면서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 원칙에 중점을 둔 복합적인 정치 체제였다. 오랜 기간 동안 파트리키(Patricii)와 그 외에 명문가 출신이 아닌 플레브스(Plebs)가 정치 투쟁을 벌이면서 공화국은 발전했다. 공화정 초기에 로마는 왕정 시대에 기원을 둔 귀족들이 통치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이 정부를 장악할 수 있게 한 법이 철폐되었으며, 그 결과 신(新) 귀족이 출현했다. 공화정이 출범하고 처음 2세기 동안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에서 지중해 세계 전체로 영토를 확장했다. B.C 3세기에 로마는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 그리스, 갈리아 남부까지 정복했다. 이후 2세기 동안 로마는 오리엔트의 상당한 지역과 갈리아까지 지배하게 된다.

체사레 마카리(Cesare Maccari)가 1888년에 그린 유명한 벽화 <카틸리나를 규탄하는 키케로(Cicero Denounces Catiline)>, 출처 : 이탈리아 로마의 마다마 궁전(Palazzo Madama) 벽화
이 시점에서 공화정 체제는 제국주의로 변질되면서 로마 제국으로 거듭났다. 로마 공화정이 로마 제국으로 이행되는 정확한 시점은 해석하기 따라 다르다. 역사가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인 임페라토르에 오른 B.C 44년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B.C 31년, 로마 원로원이 아우구스투스에게 특별한 권력을 부여한 B.C 27년 등을 로마 공화정이 종식된 시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로마가 이루었던 수많은 법률 및 입법 제도는 유럽을 비롯한 세계 전역의 근대 국민 국가와 국제기구에 그 자취를 남겼다. 또 로마의 라틴어는 유럽 여러 지역의 문법과 어휘에 영향을 끼쳤다. 로마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더불어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본 연구의 주제인 로마 공화정의 역사는 로마사 전체에서 보면 왕정과 제정의 중간 단계에 속한다. 근대 역사 철학의 완성자인 헤겔(Hegel)은 로마와 그리스는 세계사에서 소수이긴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자각한 민족이라 평가한다.
철학자인 헤겔은 기독교와 더불어 로마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유럽 지역을 문명화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생각했다. 로마와 기독교를 통해 유럽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라는 자각을 기반으로 세계사를 새로운 단계로 도약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프리드리히 헤겔의 시각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로마의 역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 제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치와 법의 영역 등에서 보여준 탁월함이 로마 역사의 의미를 찾는다. 또 다른 사람들은 로마 공화정에서 선진적인 정치 제도와 정치 행위의 행간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한 일례로 마키아벨리는 로마 공화정을 인간의 자유를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정치 제도의 본보기로 삼아, 자신이 거주하던 시기의 이탈리아의 정치적 부패를 극복하고자 했다.
공화정 초기부터 로마인들은 파트리키(Patricii)라는 귀족과 플레브스(Plebs)라는 평민으로 분류되었다. 왕정이 붕괴된 이후, 이것을 주도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Lucius Junius Brutus)는 해마다 두 명의 집정관을 뽑아 통치를 맡기는 방식을 고안해 내고 이러한 부분들이 로마의 전통이 되었다고 한다. 초기의 집정관은 연임을 무한히 할 수 있었다. 집정관의 권력은 실로 막강하여 모든 현안을 그들의 재량대로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몇몇 뛰어난 인물들이 집정관을 독식하자 또 다른 왕정으로 변신하게 될 것을 우려한 로마의 귀족들과 시민들이 연임을 제한하게 된다. 그러나 그 결과 집정관은 경험이 없는 자들이 맡는 직위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집정관들은 주로 집정관 경험이 있는 인물들이 모인 귀족 집단인 원로원의 조언을 듣고 일을 처리하고자 했기 때문에 원로원의 권력이 점점 비대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원로원의 입석을 결정하는 감찰관(Censor, 켄소르)의 권력이 매우 강해졌는데 이 감찰관은 원로원의 의원들 중 명망있는 가문만이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였던 대(大) 카토도 감찰관의 직책을 오랫동안 수행했다. 이렇듯이 원로원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원로원의 입석을 결정하는 것도 원로원이었기 때문에 이 원로원을 견제할 수단이 없다시피 되었다. 따라서 공화정 후반기로 가면 갈수록 원로원의 권력은 점점 강력해지게 된다. 그러나 집정관의 권력이 원로원으로 넘어가도 군사 지휘권(Imperium, 임페리움)은 집정관의 고유 권한이었으며, 이것만큼은 원로원의 권력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집정관들은 선출되자마자 2개 군단(각각 4,000명씩 8,000명)이 주어졌고 해마다 전투를 수행해야 했던 로마의 사정상 집정관은 주로 전선에 나가 있는 일이 잦았다. 집정관들은 실질적인 권한이 원로원에게 넘어갔어도 그들이 병력을 통솔해서 전투를 벌인다는 것에 열중했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집정관은 행정에 있어서도 가장 높은 직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집정관은 군단을 지휘하느라 로마에 머무는 일이 얼마 되지 않았고 따라서 로마에 남아 집정관 대신 행정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직책이 만들어진다. 이를 법무관(Praitor, 프라이토르)라고 한다. 법무관직 역시 초기에는 로마 시를 담당하는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나 로마 법무관 아래엔 건축물과 도로들을 관리하는 직책이 있었는데 이를 조영관(Aydiris Plebis, 안찰관, 아이딜리스 플레비스)이라고 했다. 안찰관은 원래 평민만 선출될 수 있었으며 호민관을 보조하면서 케레스(Ceres) 신전을 관리하는 일을 했으나, 이후 공공사업, 시장, 물 공급, 공공 오락을 관리하도록 권한이 확대되었다. 또한 두 명의 귀족 안찰관이 더 추가되었으며 이들은 명령권을 보유한 상위 안찰관이었다. 안찰관의 하위 직급에는 나라의 재정을 관리하는 재무관(Qoaistor, 콰이스토르)가 있었다. 앞에 서술한 직책들은 순서대로 역임해야 했고 이를 두고 로미의 명예로운 경력이라 불렀다. 주로 상부에서 임명하는 일반적인 관료 사회와는 달리 로마 공화정에서 저 직책들은 모두 선거로 당선되어야만 맡을 수 있었다. 또한 로마는 특이하게 상부의 결재를 받을 필요 없이 모든 것이 담당관의 재량으로 이루어진다는 특징이 있었다.
안찰관이 법무관보다 권위가 낮은 직책이긴 하나 안찰관은 법무관의 허락 없이 자신의 재량으로 건물을 수리하거나 축제를 개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관료제로서 유기적으로 연결된 계단식 조직이 아니라 각각 담당 분야가 따로 존재하는 선출직 행정관인 것이다. 처음에 이러한 집정관, 법무관 등은 귀족에서만 선출되었으나, 로마 초기의 평민 반란 이후에 귀족과 평민이 법적으로 동등해지면서, 호민관(Tribunus Plebis, 트리부누스 플레비스) 리키니우스(Licinianus)의 주장으로 그 수의 절반을 평민에서 선출하게 되었다. 다만, 집정관 직위의 경우는 B.C 367년까지도 파트리키 귀족들만 선출될 수 있었다. 플레브스 평민들의 발언권이 강해지자, 귀족들은 대대장(Tribunus Militum, 트리부누스 밀리툼) 6명에게 집정관 급 권위를 부여해 통치하게 하는 일명 집정 무관(Tribuni Mitum Consular Potestae 혹은 Consular Tribune)이라는 관직을 만드는 편법으로 집정관 직에 선출될 권리를 귀족들만의 특권으로 유지했다. 이러한 집정 무관 직위는 B.C 366년 평민도 집정관직을 지낼 수 있게 하는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Lex Licinia Sextia)이 통과되면서 사라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집정 무관직의 신설이 앞서 언급한 귀족-평민 간의 갈등이라는 도식은 부정되고, 2명의 집정관만으로는 당시 로마의 다중 전선을 감당할 수 없어 이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추측이 대부분이다. 파트리키는 라틴어 명사 "Patres (아버지)"에서 비롯된 용어로, 이는 고대 로마의 귀족 계급 집단을 지칭한다. 로마 공화국 초기에 권력을 독점했지만, 평민 플레브스들과 거듭된 충돌이 이어졌으며 이어 타협을 거치면서 많은 권력을 평민들에게 넘겨야 했고, 그 과정에서 고대 로마의 사회 구조가 발전했다. 그러다가 거듭된 전쟁으로 인해 대가 끊기는 가문이 많아지고 평민 출신의 신흥 귀족 노빌레스들이 대두되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하지만 권위만큼은 사회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로마 공화국에서 로마 제국을 거쳐 비잔틴 제국 시대까지도 명예적인 칭호로 사용되었다. 노빌레스가 평민 귀족이나 신흥 귀족으로 번역되는 것과 같이 파트리키는 전통 귀족, 정통 귀족, 건국 귀족, 개국 귀족 등 로마 초기부터 있던 권력 집단 씨족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번역된다. 파트리키 가문들 내에서도 주요 씨족들(Gentes Maiores)과 그 외의 씨족들(Gentes Minores)이 구분되었다고 하는데, 주요 씨족들의 정확한 목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코르넬리우스(Cornelius), 클라우디우스(Claudius), 발레리우스(Valerius), 파비우스(Favius), 아이밀리우스(Aemilius) 등 몇몇 가문들은 거의 확실하게 주요 씨족에 속했다고 여겨진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Titus Livius Patavinus)에 따르면, 로마 왕국의 건국자 로물루스가 원로원 의원으로 삼은 100명의 인사들이 아버지(Patres)로 불렸고, 이들의 후손이 파트리키가 되었다고 한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로물루스가 지혜로운 원로 100인에게 고귀한 신분을 부여함으로써 일반 평민인 플레브스들과 분리된 파트리키가 탄생했다고 주장했다. 할리카르나소스(Halicarnassus)의 디오니시오스(Dionysius)는 로물루스가 부유함을 기준으로 삼아 파트리키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로물루스가 파트리키를 창설했다기보다는 부족 국가로 출발한 로마가 주변의 세력을 흡수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개념이 도래했다고 본다. 즉, 로마가 흡수한 부족의 옛 부족장은 파트리키, 부족민은 평민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곧 소원해질 수 있는 부족장과 부족민들의 관계를 기존처럼 유지하기 위해 클리엔텔라(Clientela) 관계가 등장했다.
파트리키는 자신 휘하의 평민들을 클리엔테스(Clientes)로 삼아 보호해줬고, 클리엔테스는 그런 그들을 파트로누스(Patronus)로 받들며 그들이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파트리키는 로마 출신 귀족에 국한되지 않았고, 로마 왕국과 로마 공화정 초기 시대에 로마로 이주한 타 도시의 귀족들 역시 파트리키로 인정받았다. 타 도시의 씨족이 파트리키에 편입된 것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사례는 로마 왕국의 마지막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Lucius Tarquinius Superbus)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의 봉기로 축출된 지 5년 후인 B.C 504년에 사비니 족의 귀족 아티우스 클라수스(Attius Classus)가 500명의 친족들과 함께 로마로 망명하면서 클라우디우스 씨족을 형성한 것이었다. 로마 공화정 초기에는 파트리키의 위상이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대다수의 요직을 독차지하고 원로원에서 국정을 이끌었다. 특히 신들과 소통하고 신성한 의식을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등 모든 사제직은 오직 파트리키만 맡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