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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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민들의 해외 이주는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유태인이나 중국인, 유럽의 그리스인 및 이탈리아인 등 세계의 여러 국가에 민족들에 비해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 동포들처럼 미국, 캐나다, 일본, 중국, 중앙아시아, 러시아, 호주,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에서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인 체제의 국가들에서 다양한 형태로 적응을 시도한 민족은 역사상 그리 많지 않다.
1960년대 남미 파라과이로 떠난 한국인 농업 이민자들의 초기 정착 모습, 출처 : 국가기록포털
1860년대부터 1910년, 한일병탄이 일어난 해에 조선 정부, 세도가들의 수탈, 그리고 외세의 압력에 염증을 느낀 백성들의 이주에서 그 시작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농민들이 기근과 빈곤, 압정을 피해 국경을 넘어 중국, 러시아, 하와이, 멕시코, 쿠바로 이주했다.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경제의 수탈을 피하기 위해 이주한 백성들로서 당시에 입국이 금지되었던 지역인 연해주 남부와 간도 일대에서 농지를 개간하였고 정부의 직접적으로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신분상으로 볼 때 매우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갔다.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백성들의 이주가 시작된 때는 1902년에서 1903년부터 시작되었는데, 하와이에 거주한 일본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이 1905년에 조선인들의 국외 이주를 금지하면서 더 이상의 이주는 불가능해졌다.
1905년까지 7,226명의 조선인 이주자들이 도착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20대의 독신 남성들이었다. 이들과 결혼하기 위해서 사진 결혼의 형태로 1,000여명 가량의 조선 여성들이 1924년까지 하와이로 건너가 이민 가정을 형성하게 된다. 중남미 지역으로의 이주는 1905년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 농장의 계약 노동자로 1,033명이 떠난 것이 그 시작이며, 이들 중 300여명이 1921년에 경제난을 피해 쿠바로 재이주하게 되었다. 이후 1945년부터 1962년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이민 정책을 처음으로 수립한 해로 나타나는데, 이 시기에는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발생한 전쟁 고아, 미군과 결혼한 여성, 혼혈아, 학생 등이 입양과 가족을 재회하며 현지에 정착 및 유학 등의 목적으로 미국 또는 캐나다로 이주하게 된다.
1950년부터 1964년까지 6,000여 명 가량의 여성들이 미군과 결혼하여 배우자의 신분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동일한 시기에 약 5,000여 명 가량의 아동들이 전쟁 고아이자 혼혈아로, 또는 입양아로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러한 두 부류의 이민자들이 전후 한국인 이민자의 2/3를 차지하게 된다. 1945년부터 1965년까지 6,000명 가량의 유학생들이 학위를 취득한 후, 고국에서 누릴 사회적인 권위와 출세에 대한 기대를 갖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에 정착하거나 혹은 끝내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하면서 이들 또한 미주 이민자들로 여겨지게 된다.
이들은 미군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1965년 미국으로 이민의 문호가 개방되었을 때 가족들을 초청할 수 있는 연쇄 이민의 시작을 이루게 되었다. 1962년부터 현재까지의 이민은 이 때부터 정착을 목적으로 한 이민이 시작된 것으로 흔히 나타나고 있다. 중국과 일본, CIS 국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인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은 이 시기에 이주하여 정착한 사람들로 여겨진다. 1962년에 대한민국 정부는 라틴아메리카, 서유럽, 중동, 미주 지역으로 집단 이민과 계약 이민을 허용하고 권장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1962년 이민정책의 근본 목적은 잉여 인구로 여겨지는 국내의 인구들을 외국으로 보내 인구 압력을 줄이고 해외에서 일하며 거주하는 동포들이 송금한 외화를 벌어 국가 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명목으로 최초의 집단 이민은 1963년 브라질로 103명의 농업 이민자들이 출발한 것을 시작으로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에 농장을 개간한다는 명목으로 중남아메리카 국가들로부터 초청을 받아 이민을 간 것이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농업 경험이 없었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일이 매우 고되고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대도시로 이주해 상업에 종사하게 된다. 유럽은 1960년대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와 광부들을 중심으로 유학생, 주재원 들을 중심으로하여 이민 사회를 형성하였다. 미국과 캐나다로의 이주는 북서구 유럽계 이민자들만을 선호하던 이민법이 1960년대 중반에 개정되어 이민의 문호가 한국인들에게도 열리게 되면서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안정적인 직업에 종사했던 중산층들이 1960년대 중반 이후의 미국과 캐나다로의 이주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미국으로의 한국인들의 이민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정점으로 감소하였고, 오히려 이주를 포기하거나 역으로 고국인 대한민국으로 귀환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97년 IMF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해외 이주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미국으로 이주는 줄어든 반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로의 이주는 증가하여 해외 이주의 지역별 분포에 변화가 일어났다. 또한 종래의 가족 초청 이주는 줄어드는 반면 사업적인 부분에서의 이주와 취업 이주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동포 정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한국인은 오랜 해외 이주 역사를 갖고 있지만 현지인과 제대로 어울리거나, 현지인과 함께하는 경우가 적다. 해외에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자주 조언을 구하는 편인데 그 때마다 나는 "현지인들 사이에서 똑같이 부대끼며 생활하면 됩니다." 라고 대답한다. 현지에서 생활하거나 현지인을 제대로 알고 싶다고 하며 현지인들과 더 많이 어울리고 싶다면 현지인들 사이에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야 현지인을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며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현지에서 일반 한국 분들이 잘 알 수 없는 생생한 현지인들에 대한 정보, 서민 생활, 문화, 그로 인한 역사 등을 제대로 전달하거나 파악할 수 있는 이유는 현지인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현지인들이 사는 아파트나 주거 지역에서 살아보고 아침 조깅하면서 현지인들과 인사 나누고 아침 식사하며 커피 한 잔하면서 현지인들을 둘러보면 어느 정도 현지인들의 생활상이 대충 구도가 잡혀진다. 그러다가 보면 더 깊이 들어가는거고 그러다가 친구나 아침 식사할 수 있는 현지 동네 주민 하나 만들어 놓으면 대화하면서 그들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알파고 시나가 "한국인들 해외 많이 가지만 현지 전문가는 너무 없다. 외교가 걱정된다." 라고 했다. 코리아타운에 살면서 현지인을 모르고, 현지에 대해 주워 듣고 아는 식인데 현지 전문가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지 전문가가 되려면 현지인들 사이에서, 현지인과 소통하며 살아야 한다. 게다가 현지 전문가가 아닌 낙하산으로 내려 꽂는 식의 외교 인사를 임명하여 아그레망을 받는데, 현지에 대해 제대로 아는 자가 올 확률은 매우 적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