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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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의 수도 공항인 탈린 국제공항의 규모는 매우 작다. 그냥 서울 강남 고속터미널 보는듯 하다. 탈린 국제공항의 정식 명칭은 렌나르트 메리 탈린 공항(Lennart Meri Tallinn Airport)으로 렌나르트 메리(Lennart Meri)는 에스토리아 독립 이후, 초대 대통령이고 에스토니아 공화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다. 1929년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에스토니아 외교관이자 셰익스피어 전문 번역가가 된 게오르그 메리였고, 어머니는 스웨덴계 에스토니아인이었던 알리스브리기타 엥그만이었다. 어릴 때부터 메리는 가족과 함께 에스토니아를 떠나 해외유학을 하면서 9개의 학교를 전전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은 프랑스 파리의 장송 드 셀리 학교에 머물던 시기였다고 한다.

에스토니아의 초대 대통령 렌나르트 메리(Lennart Meri), 출처 : Estonian World
이때의 경험으로 메리는 모국어 에스토니아어는 물론 핀란드어,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독일어의 5개국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1958년 중앙아시아 천산산맥과 카라쿰 사막의 오래된 이슬람사원들을 둘러보고 온 레나트 메리는 생애 첫 저서를 집필하였고, 출판 이후 대중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아버지가 소련 당국에 의해 세 차례씩이나 잡혀가자, 아직 학생 신분이었던 메리는 작가 활동으로 생활을 근근히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형 역시 연구활동을 하다 당국의 압력으로 그만두고 택시운전사로 일하던 처지였지만 동생을 적극 도왔기 때문에, 메리는 어머니를 부양하는 동시에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이 당시 찍은 영화 <은하수의 바람(Linnutee tuuled)>은 핀란드, 헝가리와 찍은 합작 영화로 소련에서는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지만 뉴욕 영화 페스티벌에서는 은메달을 수상하는 의의를 남겼다. 핀란드의 각 학교에서는 그의 영화와 문집이 수업자료로 활용되기까지 했다. 1963년 메리는 에스토니아 작가협회에 가입하였다. 1970년대에는 핀란드 문학협회의 명예회원이 되었고, 헬싱키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에스토니아 내에서의 환경문제 시위는 머지않아 소련 통치에 대항해 에스토니아 학계가 이끌었던 전국민적 저항, 이른바 '노래 혁명'이 되었다. 메리는 연설 '에스토니아는 희망을 가졌는가'를 통해 국가 존립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대외적으로 대단한 파급효과를 내었다.
1988년에는 에스토니아 인민전선의 창립위원으로서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인민전선과 협력하였다. 1990년 사상 처음으로 공산당 없이 치러진 다당제 선거에서 인민전선이 승리를 거둔 뒤 메리는 외교부 장관직에 임명됐고, 최우선 과제로 에스토니아 외교부 설립을 주도하였다. 이후 주변 측근으로 영어를 잘 하는 젊은 지식인들을 두어 서방과의 외교채널을 수립하는 동시에, 국제무대에서 에스토니아를 더욱 더 널리 대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코펜하겐, 뉴욕,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에서 잇따라 열린 유럽 안보협력위원회 회의와 발트 해 국가 협의회의 초대회의에도 참여하였으며, 미국과 유럽의 국가수장과 외교장관들과의 수차례 회담을 갖고 동구권 국가로는 처음으로 브뤼셀의 나토 본부에서 초청인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1992년에는 발트3국 외교부장관과 EU 위원회 관계자 9인과 함께 발트해 국가 이사회와 유로패클티 (EuroFaculty)를 설립하였다. 이후 주 핀란드 에스토니아 대사를 잠시 역임하다, 조국을 위한 연합 대선후보로 선정되었다. 1차 투표에서는 에스토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최고회의의 간부의장을 맡았던 아르놀드 뤼텔이 42% 득표로 1위를 달렸지만, 에스토니아 의회에서 진행된 2차 투표는 원내의석에서 조국을 위한 연합이 앞선 상태였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반대파들은 예전에 KGB와의 연계가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으나, 이 같은 혐의들이 그의 평판과 대중의 이미지를 해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메리는 1992년 10월 6일 에스토니아 공화국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1996년 9월에는 재선에 성공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고 2006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