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238185&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빨치산의 태평소 소리 좋아했던 미군, 국악의 전도사가 되다[이희용의 월드코리안 12] 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민족·국제 이희용(hoprave)▲가야금 타는 해의만만년의 해...
페이푸스호 전투는 튜튼 기사단을 포함한 서구 세력 전반의 러시아 진출을 좌절시켰던 전투다. 덴마크는 이 전투 이후 더 이상 발트 해 연안으로의 진출을 모색하지 않게 되었으며, 도주했던 도르파트 주교 헤르만 또한 노브고로드와의 분쟁을 더 이상 일으키지 않게 되었다. 이 전투의 주축이었던 리보니아 기사단은 전쟁의 결과로 많은 인적 손실을 보았고, 전쟁의 패배로 튜튼 기사단 내부에서의 발언권 또한 약해지게 되어 리보니아에 대한 튜튼 기사단의 통제력이 강해지게 되었다.

러시아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의 경계, 얼어붙은 페이푸스 호,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또한 발트해 지역에서 무적으로 군림하던 십자군의 패배가 알려지면서 리보니아 지역 원주민들의 반란이 촉발되었고, 이는 발트 해 이남으로까지 영향을 미쳤다. 반면 튜튼 기사단은 이 전쟁으로 인해 일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노브고로드에 대한 성전의 주축은 어디까지나 리보니아 기사단이었으며, 튜튼 기사단 본부에서는 이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전쟁에 많은 자원을 소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리보니아 기사단의 발언권이 약해지면서 그에 대한 튜튼 기사단의 통제력이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페이푸스호에서의 패배가 튜튼 기사단이 지배하고 있던 프로이센 지역 원주민들을 크게 자극하였으며, 이에 따라 이들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장기적인 전쟁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페이푸스호 전투는 튜튼 기사단의 쇠퇴를 불러왔다. 십자군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알렉산더 네브스키는 루스 전 지역에서 영웅으로 추앙 받았으며, 노브고로드 내에서의 그의 입지도 확고해졌다.
그는 이후 서방 세력과의 지속적인 분쟁을 우위로 이끌었으나, 당시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몽골에 대해서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여러 반(反) 몽골 봉기를 진압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통치는 러시아의 안정을 불러왔고, 이후 그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성인으로서 추앙받게 된다.
결과적으로 페이푸스호에서의 전투는 러시아와 서구 국가들 간의 국경선을 확립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페이푸스호를 기점으로 한 국경선은 대개 유지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에도 페이푸스호는 에스토니아와 러시아 공화국 간의 자연적인 국경으로 유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