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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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세 명의 음악가인 표트르 차이코프스키(Пётр Чайковский)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Николай Римский-Корсаков), 이고르 스트라빈스키(Игорь Стравинский)가 모두 탈린을 사랑한 것은 그들이 모두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러시아의 유럽으로 난 창’이라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제정 러시아가 유럽 본토로의 진출을 꿈꾸던 교두보이자, 유럽 문화를 흡수하는 출입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탈린까지는 약 360km. 자동차로 5시간이 채 안 되는 거리다.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을 코투오차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풍경,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차이코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닌 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와 함께 여덟 살 때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20대 중반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살았다. 또한 말년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보냈다. 그런 차이코프스키가 처음 탈린에 간 것은 1877년 이혼 후 노이로제와 자살 기도 등으로 심신이 피폐했을 때이다. 차이코프스키는 그가 선망하던 서유럽으로의 도피를 꿈꾸며 탈린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그때 그가 가장 자주 찾았던 곳이 탈린 구시가의 가장 높은 곳 톰페아 언덕에 있는 코투오차 전망대였다.
코투오차 전망대에 오르면 눈 아래로 붉은빛 탈린의 지붕들 때문에 눈이 부시다. 멀리 핀란드만에 접한 탈린항으로 들어온 북유럽의 대형 크루즈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선홍빛 도시의 건물들로 볼 때 차이코프스키가 본 것은 물론 저 화려한 스웨덴과 핀란드의 크루즈들이 아니라 러시아의 발틱 함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탈린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지만 자살까지 시도했다가 이곳에 온 차이코프스키는 분명 이 풍경 속에서 다른 희망을 가지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다. 그 후 그가 만들어낸 주옥같은 음악들은 탈린에서 가진 희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차이코프스키와 동시대를 산 림스키코르사코프가 탈린을 찾았던 것은 그가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기 전이다. 귀족 출신으로 해군에 입대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탈린에서도 복무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와 작곡 공부를 했지만, 집안 분위기 때문에 해군에 입대한 그는 가까운 지인에게 해군 시절 배 위에서 바라봤던 탈린을 회상한 적이 있다.
“바다에서 본 탈린은 세상에서 가장 평안해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정열적으로 핀 붉은 장미 같았어. 거리에는 늘 음악 소리가 들렸고, 그 음악 소리에 사람들의 표정은 평온하지만 뜨거워 보였거든. 그런 탈린을 보고 있으면 격한 피아노 선율이 생각나곤 하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바라보는 방향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솟아오른 돔 교회는 ‘탈린의 윗동네’인 톰페아 지역의 보석이다. 검은 종탑 마루 아래로 새하얗게 빛나는 종탑, 그리고 그 아래 빨갛게 익은 사과 빛의 지붕은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 교회는 탈린 구시가의 역사와 함께 한다. 1219년 덴마크인들이 처음 탈린을 건설했을 때 세워진 것이다. 목조 건물인 이 교회는 에스토니아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다. 차이코프스키가 즐겨 봤던 것과는 정반대 방향에서의 본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눈길은 사실 에스토니아와 탈린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배어 있는 배경이다. 에스토니아는 제 나라의 역사를 지니고 산 세월이 길지 않았기 때문이다.
슬라브인과 게르만족 사이에서 근근이 살아가던 에스토니아인들은 17세기 30년 전쟁의 결과물로 스웨덴에 속하게 된다. 1721년 북방전쟁 후 이번에는 러시아 땅이 된다. 러시아 황제 치하의 세월은 무려 200여 년. 러시아 혁명 후 1918년 에스토니아공화국으로 간신히 독립하지만 그것도 잠시,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의 지배를, 전후에는 다시 소련의 지배를 받는다. 1989년 8월 23일, 이웃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까지 약 200만 명의 민중들이 탈린과 라트비아의 리가, 그리고 리투아니아의 빌뉴스를 잇는 장장 580km의 인간 사슬을 만들어 구소련에 저항한다. 2년 뒤 소련이 붕괴하면서 에스토니아는 마침내 완전한 독립국가가 된 것이다.
그런 역사의 소용돌이를 뚫고 선 탈린의 진짜 매력은 길에 있다. 성채의 한쪽 문인 비루 문(Viru Varavad)에서 이어진 비루(Viru) 거리며, 항구 쪽에서 들어와 ‘뚱뚱한 마르가레타 성탑(Suur Rannavarav ja Paks Margareeta)’에서 구시가로 이어지는 피크(Pikk) 거리, 코투오차 전망대 바로 아래 피크 얄리(Pikk jalg) 거리를 비롯한 구시가를 잇고 있는 크고 작은 골목들은 탈린을 가장 중세답게 느끼게 해주고 있다. 차이코프스키와 림스키코르사코프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나고 자란 스트라빈스키는 1905년 사촌 동생인 예카테리나 노센코와 결혼한 후 탈린으로 신혼여행을 왔다. 오랫동안 사랑했던 두 사람이지만, 사촌 간의 결혼을 좋은 눈으로 봐주지 않던 당시 분위기 때문에 두 사람의 결혼은 축복보다는 눈 흘김이 더 많았다.
결혼을 하고도 울적해 하는 노센코를 위로하기 위해 스트라빈스키는 이 길들을 자주 걸었다. 거친 돌길이지만 그들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들을 줬는지 모른다. 나중에 스트라빈스키가 미국에서 가진 몇몇 인터뷰에는 탈린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교회(Собор Александра Невского)와 홀리 고스트 교회(Церковь Святого Духа)가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