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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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지역은 면적은 러시아 영토의 37%인 620㎢에 달하는 광활한 지역으로 면적은 우리나라 남북한 면적의 약 30배에 달한다. 인구는 러시아 전체 인구의 약 10%인 1,000만 정도에 달하며 러시아 전체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이 지역에는 러시아인 72.5%로 민족 구성으로 볼 때 가장 높고 ,다른 소수 민족들도 있지만 이 지역에 가장 많은 소수민족은 아이러니하게도 우크라이나인이다. 우크라이나인은 극동에서 약 15.4%가 거주하고 있다. 지구 반대편 러시아 내 우크라이나 인들이 극동에 꽤 많이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젤레니 클린(Zelenyi Klyn)', 일명 '초록 우크라이나(Green Ukraine)',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극동 지역의 농지 총 면적의 82%는 중국과의 국경을 접경하고 있는 아무르 주와 연해주에 있으며 특히 아무르 주에는 농경지 총 면적의 약 60%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 농경지 중 39%는 우크라이나인들이 경작하고 있다. 그런데 러시아가 시장 경제로 전환한 이후로 아무르 주의 곡류 생산은 크게 감소하고 있다. 곡류의 생산성 저하 문제는 시장 경제 이후 극동의 농장들이 비료를 사용하지 않은 채로 곡물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맥류와 콩을 재배하는 면적이 감소됨에 따라 초지로 그냥 놀리는 농지의 면적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풀과 사료를 소비하는 젖소와 육우를 사육하는 개체 수가 증가한 것이 아니라, 총 농지 면적의 60%에 해당하는 초지가 제대로 활용되지 않은 채 놀리고 있는 땅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료를 쓰지 않고 농사를 짓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극동 지역에서 비료 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비료의 값이 높게 형성이 된 원인은 극동에 비료 공장이 없기 때문인데 유럽과 러시아의 서부 지역에서 생산되는 비료를 수송해서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료를 서부 러시아에서 수급하여 극동에 제공하는 업체들도 우크라이나 업체들이 많다.
그러나 이들 우크라이나인들은 서부 지역에서 지금도 러시아와 격전을 벌이고 있는 우크라이나인들과 동일하다 생각하면 안 된다. 이 우크라이나인들은 철저히 러시아화 된 우크라이나인으로 자립적 정체성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의 정당 중 극우 정당인 지리노프스키의 자유민주당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며 전 하바로프스크 주지사로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에 찍혀 실형을 살고 있는 세르게이 푸르갈(Сергей Фургал)도 아무르 주 지역 포야르코보(Поярково) 출신의 우크라이나계이며 더불어 유태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본래 우크라이나인들이 이와 같이 머나먼 극동 땅까지 오게 된 것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선조인 코사크인들이 시베리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7세기부터 태평양 연안에 진출하였으며 주변의 경쟁국들을 사이에서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시베리아 지역을 병합했다. 19세기 중반에는 우수리 강 인근까지 영토를 확장했는데 그 중심에는 코사크인들이 있었다.
코사크인들은 농노 출신들이 많았지만 그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부에 일정금액을 바치면 자유인이 되거나 러시아 정부의 시책에 의해 강제 동원되어 장악하는 시베리아 땅을 코사크인들에게 무상으로 준다고 약속하는 방식으로 동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대신 코사크인들이 정복한 시베리아나 극동 지역을 정부의 지원 없이 알아서 개발해야만 했다. 특히 극동에 유형오는 러시아의 예술가들과 지식인들과 통혼하여 아버지는 유형이 풀려 서부 러시아로 돌아가더다라도 그들의 자식들은 극동 땅에 대대로 남는 경우가 많았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빠르게 산업화를 진행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서유럽 국가들보다 그 수준이 낮았다. 유럽 동쪽에서 아시아 북쪽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관통하는 교통망이 부재했기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했던 것이고 극동에는 쇠퇴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강한 청나라와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일본이라는 경쟁국들이 있었기에 극동 지역은 지정학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너무 거리상으로 멀기 때문에 유럽 러시아 지역이 극동의 영토들을 지원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정부도 통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극동에 경제, 사회, 군사적인 자생력을 갖춘 자국민 공동체를 확보하고자 하였고, 이는 자연히 자국민의 극동 이주 정책, 이른바 식민이주(переселение)로 이어지게 된다. 특히 19세기 중반에 이뤄진 식민이주는 정부 차원에서 많은 지원이 이루어졌으나 오히려 생각보다 많은 지원과 이주에 놀란 당국의 이주 제한과 그로 인한 평민 및 농노 러시아인들의 적극성 결여, 불편한 교통 여건, 이주 지역에 대한 정보 부족 및 주 이주민인 농민들의 봉건적인 여건으로 인해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나 새로운 시베리아 영토를 확보하고 더욱 늘려나간 로마노프 정부 당국에 의해 극동 지역의 군사력 강화와 군 주둔지 건설이 추진되면서 이주민들의 자유 이주와 자유 영지를 제공하는 등의 많은 특혜를 주었다. 이에 따라 제국을 구성하는 많은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들, 그리고 일부 벨라루스인들이 극동으로 새롭게 이주하게 된 것이다. 특히 로마노프 귀족들의 학정에 시달리고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이주가 매우 압도적이었는데, 아무르 강과 태평양 사이에 위치하는 극동 지역을 당대 우크라이나 이주민들은 녹색 쐐기를 의미하는 뜻에 젤레니 끌린(Зелений Клин)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