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들어서 그리스 독립전쟁으로 그리스를 마지못해 독립시킨 오스만투르크는 유럽 열강에게 계속적으로 패배했다. 그래도 오스만투르크 제국에서는 그리스 독립 전쟁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더 이상 그리스인을 요직에 기용하지 않으면서부터 드라고만(Dragoman - 서구와의 교섭을 위해 설치한 외교부) 같은 관료직에 '아르메니아인'을 대거 기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발칸 반도의 슬라브인들과 그리스인들이 민족 의식을 각성하고 자치 혹은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서도 아르메니아인들은 대체로 수동적인 모습을 지켰고, 애초에 도시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투르크 정부 덕택에 자신들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독립에 대한 동력이나 처지에 대한 불만은 크게 없었다.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 있는 아르메니아 대학살 추모기념관,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하지만 아르메니아 인들도 언제까지 오스만투르크의 2등 신민이 될 처지를 받아들일 것은 아니었고, 아르메니아 인들 사이에서도 교육 받은 지식인층이 생겨나기 시작하자 이들도 자신들의 권리 향상을 위해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1875년경에는 아르메니아 총대주교까지 나서서 토지 몰수, 무슬림들에 의한 약탈과 강제 개종, 강간과 살인을 막아 달라고 청원했지만 내부 문제가 심각했던 오스만투르크가 그들의 청원대로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어도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한 경우는 전무했다. 오스만 제국은 20세기 초부터 곳곳에서 붕괴 조짐이 보이고 있었고, 사회의 유지를 위해 오스만 당국이 선택한 방법은 인명 살상을 동반한 대대적이고 가혹한 탄압이었다.
그러던 사이에 터키 동부 지역에서는 탄압에 반발한 민족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가지안테프도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인과 쿠르드족의 반란으로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터키 독립 전쟁 당시 아르메니아 군이 터키를 침공했으나 패전하고 영토를 상당부분 상실한 적이 있으며, 아라랏 산은 스탈린이 아르메니아 민족주의를 약화시킬 목적으로 일부러 터키에 양도하면서 양자 사이의 갈등은 아주 첨예해졌다. 다만 요즘 들어 아르메니아의 반 터키 감정은 식은 편이며 오히려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을 더 싫어한다. 본래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전 역사만 보면 아르메니아인과 오스만 제국은 서로 우호적인 관계였다.
중세 셀주크투르크 제국의 팽창 과정에서 많은 아르메니아인이 학살당하고 킬리키아-아르메니아 왕국에서 십자군을 지원하며 투르크계 이슬람 국가들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오스만 제국은 비잔틴 제국의 후신을 자처하면서 실용적인 이유로 비잔틴 제국 내에서 활약했던 아르메니아인들의 권익을 보장했었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진 이란 사파비 왕조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 아르메니아인 십수만여 명이 사망했던 것에 비해 근세 오스만 제국에서는 기존의 아나톨리아 내 아르메니아인 디아스포라를 그대로 활용하였다.
오늘날처럼 사이가 나빠진 계기는 19세기 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카프카스를 정복하고 아르메니아 주를 설치하고 아르메니아 인들이 대거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 이주한 것과, 터키와 아르메니아 양측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부흥 그리고 그 결과로 빚어진 것이 아르메니아 대학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