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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미국의 파키스탄 회담에서 등장한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26 15:33:01
  • 수정 2026-05-06 12:56:50

이란과 미국의 파키스탄 회담에서 이란이 우라늄 농축을 중단하고 핵 개발을 포기할 경우, 미국의 안보 보장을 논의하던 중, 이란 측은 미국에게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 당시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존중하고 보호하겠다며 약속한 내용에 대해 이를 현재까지도 어떻게 이행하고 있는지 물어봤다고 한다. 미국은 이에 답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란-미국의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열린 협상,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독립 이전에는 우크라이나는 당시 소련이었기에 미국과 공식적인 관계가 없었지만, 소련이 해체되면서 양국은 공식적으로 수교하게 된다. 소련 해체와 더불어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하자 미국은 이를 즉시 지지했으며 키예프에 미국 대사관을 설치함으로 인해 양국간의 관계는 재편성된다. 당시 우크라이나에는 핵폭탄 약 5,000발과 ICBM 170기 이상을 보유한 세계 3위의 핵보유국이었다. 이는 소련의 과거 흑해함대 사령부였던 오데사에서 핵잠수함이 3척을 보유했기 때문에 소련이 해체되면서 경제 위기로 인해 핵무기를 가져가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우크라이나에 남겨둔 것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신생 독립국으로 러시아보다 더 심한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었다.


1994년 당시만 해도 우크라이나의 1인당 GDP는 1,000달러도 채 되지 않은 아프리카 빈국 수준이었고 전체 유럽으로 보면 최빈국인 알바니아보다 1인당 GDP가 낮은 국가였다. 1인당 GDP는 몰도바와 서로 유럽에서 최하위를 다투고 있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고 물가상승이 통제를 벗어난 상태로서 수백%의 인플레이션율을 기록하는 상황인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에 놓여있던 아주 심각한 상황인 것이다. 이와 같은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해외에 판매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특히 1992년부터 재임한 우크라이나의 3대 제1부총리 이호르 유흐노우스키(Ігор Юхновський)는 우크라이나의 핵무기를 두고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소유임을 주장하며 핵무기를 국제 경매에 내놓아 가장 비싸게 부르는 국가에 팔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가 경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핵무기를 볼모로 유럽을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더불어 국제 핵 질서를 교란에 빠트릴 위험이 있다는 판단을 한 미국은 넌-루가 협력적 위협 감소(Nunn–Lugar Cooperative Threat Reduction, CRT) 프로그램을 통하여 옛 소련 영역 내 존재하는 핵무기의 감소를 대가로 이들 국가에 막대한 양의 경제적 지원을 실시하는 정책을 공식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그러면서 은근히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체결하도록 유도하게 했는데 당시 핵무기는 우크라이나가 소유하고 있었지만 소유권은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 연방공화국에 있었기에 미국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이 모스크바로 날아가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이 문제로 회담을 갖게 된다. 이 두 나라는 5시간에 걸친 회담 끝에 우크라이나의 핵을 폐기하기로 결정한다. 


즉, 우크라이나의 핵미사일과 시설은 미국이 주도하여 폐기하지만 핵폭탄에 들어있던 핵물질은 러시아로 보내는 것으로 합의했고 이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미국이 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미국과 영국,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핵확산금지조약(NPT)의 체결을 요구했고 핵을 포기하는 대신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독립성을 인정받고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1994년 5월 핵확산금지조약에 비준하면서 핵 폐기 절차를 밟게 된다. 국제 사회는 우크라이나의 현 국경에 대한 주권을 확인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에 안보리가 대처한다는 조약을 정식으로 1994년 12월 5일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체결하게 되는데 이를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Будапештський меморандум)라고 부르게 된다. 이 각서에서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러시아, 미국, 영국이 서명하였고 핵탄두와 ICBM을 전량 러시아로 반출하기로 약속했다.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Будапештський меморандум)로 알려진 우크라이나의 핵 포기 약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의 주권, 독립성, 현재 국경선을 존중한다

2.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위협이나 무력사용을 자제한다.

3.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경제적 위협을 자제한다

4. 우크라이나가 핵 공격을 받는다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 사안을 논의한다

5. 미국, 러시아, 영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핵공격을 자제한다

6. 상기 조항에 변경이 있으면 따로 협의한다


이 양해 각서가 체결되던 1994년 당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상대로 크림반도의 독립과 소련의 흑해 함대를 분할하는 것에 대한 논쟁이 격화되고 있던 때였다.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자 크림반도의 러시아계 주민들은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는데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의 경우, 러시아군의 흑해 진출 요충지로서 소련 해군의 흑해함대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림반도는 러시아 입장에서도 절대 잃을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이에 대한 양자간 갈등은 러시아가 크림반도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영유권을 인정하고 그 대신 러시아가 세바스토폴을 임차하면서 흑해 함대의 관할권을 가지는 것으로 1997년 평화적으로 종식되었는데, 이는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Будапештський меморандум)로 인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현존 국경선을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후 우크라이나는 자국의 원전에서 쓰는 우라늄 원료를 모두 러시아로부터 수입하고 사용 후 핵연료도 러시아로 반출해 처리했으며 약속대로 미국은 이 과정에서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핵미사일과 시설은 미국의 주도로 폐기되었고 핵폭탄에 들어있던 핵물질은 러시아로 보내졌다. 그리고 1996년 6월 모든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겨 비핵화를 완료하게 된다. 만약 우크라이나가 1994년 12월에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Будапештський меморандум)를 조인하지 않고 끝까지 핵무기를 가지고 버텼다면 미국과 서방 국가들은 엄청난 경제적 제재를 가했을 것이다. 사실 1994년 5월 핵확산금지조약에 비준하라고 촉구한 것도 사실상 서구 열강들과 러시아의 반강제적인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경제 상황은 심각했다. 


1932~1933년 350만 명이 아사한 홀로도모르(Голодомор, 우크라이나 대기근)가 재현될 수 있는 최악의 경제 위기에 몰려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처럼 핵무기를 가지고 버틸 여력이 없었다. 그 이유는 북한과 달리 우크라이나의 자원은 전체를 공업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족한 것이 현실이었고 본래 공업화보다는 세계 3대 곡창지대인 흑토(黑土)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농업화가 아주 잘 되어 있는 나라였다. 오히려 공업적인 부분은 소련 시절, 러시아 소비에트 영내 꼼비나뜨 자원 공업 지대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며 러시아 동부, 돈바스 지역에 지하자원들이 몰려 있었기에 그곳에 한하여 중공업이 성행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중공업 기간 산업이 매우 취약한 상태에서 해당 공단, 공장들의 소유권은 당시 소련에 있었기에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 연방공화국의 소유나 다름없었다. 


결국은 우크라이나가 핵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경제적으로 완전히 파산하여 어차피 러시아에 귀속될 판이었다. 그나마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Будапештський меморандум)로 인해 미국과 영국 등이 어느 정도 차관도 해주고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줬기에 1996년 9월 2일에 우크라이나 국립은행에서 자국 통화인 흐리브냐를 만들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가 핵을 포기했기에 지금이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나라 구실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Будапештський меморандум) 그저 '양해각서'였을 뿐 구속력있는 '협정'이 아니었다는 것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만약에 이것이 '안전보장 협정'이라는 명목으로 맺어졌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리비아는 당초 이스라엘의 위협을 겨냥하여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1969년 집권한 무아마르 카다피는 강력한 반(反) 이스라엘과 반(反) 서구를 주창했던 인물이다. 한편 리비아가 견제하는 이스라엘 정부는 핵무기 보유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실제로 핵실험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실험실에서 충분한 핵무기 제조 기술을 습득했고, 시뮬레이션을 통해 핵 위력에 대한 감정을 했을 것이라는 것이 국제 사회의 정설로 자리 잡고 있다. 리비아는 1975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다. 이후 카다피 시대가 도래하면서 내부적으로 비밀리에 핵 개발을 추진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의하면 리비아의 핵 프로그램 수준은 초보적인 단계에 있었고 핵무기가 완성되기까지는 최소 3~7년 정도가 필요하다고 보있다. 2003년 3월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어 사담 후세인이 체포되자 카다피는 미국이 리비아도 공격할 수 있다고 심각하게 우려했고, 후세인의 전철을 밟지 않을지 두려워했다. 


그래서 카다피는 영국 비밀정보국 MI6을 통해 미국과 영국에 특사를 보내 모든 대량살상무기(WMD)를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2003년 4월부터 미국과 리비아의 비밀 협상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핵 추진 과정과 모든 프로그램에 대한 공개를 요구했다. 그러자 리비아는 핵 프로그램을 미국에 모두 공개했으며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TBT)에 가입하고, IAEA의 사찰도 받았다. 따라서 2003년 12월 리비아는 공식적으로 핵무기를 포함한 모든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공식적으로 천명하게 되었다. 이후 리비아에 대한 비핵화는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스커드 미사일 등 핵미사일 장비를 미국으로 이송했으며 원심분리기 등 리비아의 핵무기 제조 장비와 관련 서류 총 25톤 가량이 미국 테네시 주 오크리지 국립 연구소 창고로 옮겨졌다. 2005년 10월 리비아의 핵 프로그램은 완전히 폐기됐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미국 2004년 2월 리비아에 대한 경제제재 등을 해제했다. 6월 리비아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여 미국은 24년 만에 외교관계를 회복했다. 이어 같은 달에 미국은 리비아를 25년 만에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했다 2004년 9월, 리비아에 대한 경제제재는 공식 해제되었다. 리비아가 '완전한 핵 포기'를 선언한 뒤 실제 핵 프로그램이 폐기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1년 10개월이다. 리비아가 확실한 핵 포기 의사를 보이며 IAEA의 포괄적 사찰을 바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복잡한 검증 단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러나 이같은 보상 뒤의 최후는 아주 비참했다. 2011년 서방의 색깔혁명으로 기획된 아랍의 봄이 발생하면서 내전이 발생했고, 카다피는 미국이나 서방에 버림받았다. 그리고 카다피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결국 리비아와 카다피는 미국으로부터 자신과 국가의 안보를 보장받지 못하고 그대로 핵을 포기했으며 그 댓가는 참혹했다. 


이란은 미국이나 이스라엘로부터 확실한 안보를 보장받고 싶어했고, 그것이 이란과의 협상이 타결되어 농축 우라늄을 포기할 것인지가 관건이었지만 미국-이스라엘은 그 안보 보장을 약속하지 않으려 했다. 잘못하면 우크라이나나 리비아 꼴이 날 수 있는 상황이고, 그렇게 흘러가고 있기에 이란은 미국에 불신이 강하다. 당연히 회담은 결렬 될 수밖에 없고, 이란은 농축 우라늄이 유일하게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마지노선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협상은 없고 미국은 큰 딜레마에 빠졌다. 장기간 동안 호르무즈를 역봉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군 내 불만도 쌓이고 있으며 보급 문제 또한 썩 좋지 못하다. 게다가 모든 역량이 호르무즈와 오만만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 중국이 인도-태평양 전략을 돌파하기 위해 행동을 개시하기라도 한다면 역봉쇄 하고 있는 미군이 오히려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몰리게 될 것으로 본다. 이제부터 중국이 어찌 움직이는지, 주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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