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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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Socialism with a human face)라는 슬로건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내세운 공산주의 사상 내부에서 자유화 정책을 펼치고자 시행했던 표어이다.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주로 1968년 둡체크가 주도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민주화 정책을 가리키고 있지만 공산주의 내에서 일대의 변화를 추구한 것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 민주적인 변화로 생각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와 자유 민주주의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상극의 모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민주화나 자유 민주주의의 추구는 공산주의를 완전히 타파한 다음에야 가능하다. 물론 이와 같은 "인간의 얼굴한 사회주의"는 둡체크 이후로도 정치적으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글라스노스뜨 정책이나 중국의 천안문 운동 등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민주적인 운동 또는 사회주의 내부 개혁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둡체크의 이와 같은 공산이론은 1990년대 동유럽이 자유 민주주의로 바뀔 때, 사상적 불씨가 되었고 동유럽의 민주화를 이끌어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상징하는 인물, 알렉산데르 둡체크(Alexander Dubček)가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모습,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1968년 4월 발표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기본계획 중에서 "사회주의는 단순히 착취 계급의 지배로부터 노동자들을 해방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도 인간적으로 더 나은 풍요로운 삶을 제공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말로만 본다면 기존의 마르크스 이론에서 좀더 진화된 이론이고 레닌의 이론, 스탈린의 이론과는 반대되는 개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기존에 부르주아를 때려잡아 그들의 재산을 노동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막연한 평등 의식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배경에는 단순히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나타나는 민중 평등이 아닌 민족적 갈등으로 인한 이론 및 노선의 변화로 나타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는 자유 민주국가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1947년 2월, 공산당이 의회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로 탈바꿈한다. 공산당 정권은 1960년대 소련식 중공업화를 추진했지만,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중공업이 발전해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현실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로 인해 소련식 경제정책은 생각보다 저조한 효과를 내었고 여기에 러시아인을 극도로 혐오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의 불만까지 겹쳐 변화를 요구하게 된다. 또한 1960년에 헌법을 개정하면서 연방제에 대한 별도의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앙정부에 대한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의 불만이 높아진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8년 1월 5일, 슬로바키아 지역 공산당 제1서기였던 둡체크가 체코슬로바키아 최고 회의에서 안토닌 노보트니(Antonin Novotny, 1904~1975)를 대신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로 선출되었다. 당시 개혁파였던 둡체크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총수가 될 수 있었던 것에는 출신배경이 슬로바키아이고 소련에서 자랐다는 것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둡체크는 어렸을 때부터 소련에서 교육을 받았던 만큼 당시 공산당 내에서 소련 출신 엘리트라는 이미지가 강했었다. 그로 인해 처음 둡체크가 제1서기에 선출되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단순한 내부 인사 교체가 아닐까 하는 회의론이 팽배했다.
둡체크는 당시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해 언론과 출판, 표현의 자유에 대한 통제를 완화시켰다. 특히 자신이 오랜 기간 연구하고 내세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Socialism with a human face) 이론은 공산당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을 허용함으로 인해 결국 "프라하의 봄"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이 시기에 정치범으로 투옥되었던 요제프 스므르코프스키(Josef Smrkovsky, 1911~1974), 즈데네크 믈리나르시(Zdenik Mlynarsi, 1930~1997), 구스타프 후사크(Gustav Husak, 1913년~1991) 등의 저명 인사들을 석방시키기도 했다. 이는 단순하게 서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자유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아니라, 공산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 내부에서 적대 계급이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독재 끝에 마침내 일소되었고, 새로운 단계의 사회주의 국가인 전인민국가가 출현했다는 나름의 이데올로기성 기반이 생성되어 있었다.
물론 적대 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계급 문제가 대부분 일소된 상황에서 민주주의와 야당을 허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당시의 공산주의 내에서 개혁파들이 반공주의자는 절대로 아니었고 더불어 나토와 같은 서유럽 및 미국의 간첩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둡체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야당의 결성을 묵인하고 체코슬로바키아 내 다당제를 허용하였으며 비밀 경찰의 권한을 약화시켜 공산 체제 내의 변화를 주려 했다. 당시 체코슬로바킹라 사회 민주주의자들은 별도의 당을 설립하여 일당 체제인 공산당을 비판할 수 있었으며 특히 프라하에서는 공산당을 비판하는 토론이나 출판이 활발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가 추진한 이와 같은 개혁에 헝가리의 서기장이었던 카다르 야노시(Kádár János, 1912~1989) 등은 절대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체제 개혁을 불편하게 보는 이들이 있었다. 특히 소련은 동유럽의 체제 개혁 자체가 서구나 미국과 같은 진영에 설 것을 매우 불안해 하고 있었고 당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위치 또한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이에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 또한 그 정세가 매우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뛰어든 가운데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베트남과 구(舊) 인도차이나 지역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기에 지구 반대편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개혁이 발생한다는 것은 오히려 자국 내 지도력를 약화시킬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던 중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개혁 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던 스탈린주의 보수파들은 비밀리에 소련에 무력개입을 요청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동남아시아로 관심을 갖고 있었던 소련은 반대 측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언가 반동적인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사태를 그닥 달가워하지 않았다. 결국 소련군은 다른 바르샤바 조약기구 군대들과 함께 1968년 8월 20일 체코슬로바키아에 진입하게 된다. 이 때 둡체크, 루드비크 스보보다(Ludvik Svoboda, 1895~1979) 등 개혁파 지도자들을 반동분자로 체포하고 소련군의 개입에 반발하는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소련의 설득을 받아 공산당 서기장이 된 구스타프 후사크가 기존의 공산주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둡체크의 개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사회주의를 보다 민주적인 형태로 바꾸려 했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개혁은 당시 스탈린주의로 대표되던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현실 사회주의를 개혁하려 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이와 같은 내부 개혁의 시도는 현실 사회주의에 염증을 느끼던 서구 지식인들에게 여러모로 큰 인상을 주었고 이후 서구 좌파는 정치적으로 소련식 사회주의를 벗어나 유고슬라비아 정책의 티토주의와 민주 사회주의, 유럽 공산주의, 사회 민주주의, 제3의 길, 그리고 미국 내 불어닥친 68운동과 히피 운동과 페미니즘 등으로 점철되어진 다양한 좌파적 대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또한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은 사회주의 국가들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이후 20년이 지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집권 당시 글라스노스뜨 정책과 1989년 동유럽 혁명 이후 개혁파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모델이 되기도 했다.
특히 소련에서는 1989년 11월 26일 소련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프라우다> 논설을 통해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무력 진압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하면서 Социализм с человеческим лицом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인용하여 소련 내에서 재평가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둡체크의 사상적 이론은 체코슬로바키아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둡체크가 서기장이 된 1963년부터 사회 풍조나 문화계 검열이 완화되었고, 체코의 문학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와 보후밀 흐라발(Bohumil Hrabal, 1914~1997)도 이와 같은 개혁 분위기에 등장했다. 체코 영화계 또한 폴란드 학파를 이어받아 뉴 웨이브(New wave), 프랑스권에서는 누벨바그(Nouvelle Vague)라 불리는 유행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산권 국가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 분방한 스타일과 사회 비판적인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기에 이 일시적인 시기를 두고 체코슬로바키아 문화의 황금시대로 일컫는다. 그리고 이러한 얼마 안 되는 체코슬로바키아 문화의 황금시대가 종언된 시기도 역시 둡체크가 퇴진하고 정상화(Nomalizace) 체제 이후부터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