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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세 아랍에미리트(UAE) 지역 토후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관계
  • 알렉세이정 칼럼리스트
  • 등록 2026-05-13 16:59:16

오늘날 아랍에미리트가 차지하고 있는 지역은 2002년 두바이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엠프티 쿼터(Empty Quarter) 사막 끝에 위치한 사루크 알 하디드(Saruq Al Hadid)에서 발견된 철기 유적지로 인하여 최초의 철기 시대가 B.C 약 6세기경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B.C 450년경부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지배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본래 이 지역은 몇 개의 작은 토후 족들이 난립하던 지역이었는데 오래 전부터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아 해상 교역으로 인해 부유해진 토후족들이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가 페르시아에게 정복되고 이후, 이 지역은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유역과의 교역이 끊기자 쇠퇴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들 토후족들은 페르시아에게 굴종하여 페르시아의 지배를 스스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페르시아 총독이 직접 와서 통치하는 구조는 아니었고 페르시아 왕이 각 토후족들을 각 지방들의 왕으로 책봉하여 다스리게 하는 구조였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오만과 잔지바르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야루바 이맘국(Yarubid Imamate)과 알부사이드 왕조(Albusaid Empire)의 영토 확장 및 해상 무역 세력권,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그러한 형태였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에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했으며 로마 제국의 시대에도 해당 지역에 대한 무지와 더불어 그들의 별다른 교역이 없었기 때문에 지배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시대가 도래 하고 이 때 이 지역의 중요성을 간파한 샤푸르 1세는 현 아랍에미리트와 오만 땅에 군대를 파견하여 각 토후족들을 정복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후 사산 왕조가 로마 제국 및 비잔틴 제국을 정벌하러 떠난 사이 아랍 토후족들은 원조 쿠라이시 가문 및 오만과 예멘 등지에 살던 각 사막 종족들과 공모하여 사산 왕조의 세력을 축출할 것을 획책하였다. 그러자 아랍 연합 종족들은 서로 동맹을 맺고 시리아 등지에서 로마와 전쟁을 벌여 공을 세운 또 다른 아랍부족 및 이집트인들과 연합하여 현 바레인과 카타르 일대의 동부 아라비아 해안 지대를 점령하였다. 비록 이러한 아라비아 종족들을 돕기는 하였지만 시리아 등지에서 사산 왕조의 편에 서서 로마를 격퇴했던 아랍인들이 아라비아 반도 내의 아랍 종족들을 좋지 않게 여겼다. 


따라서 이들이 고용한 아프리카 소말리아나 에티오피아에서 고용한 노예병들이 난동을 일으키자 시리아의 아랍인들은 페르시아군을 도왔고 격퇴까지 했던 정규병으로 노예병들을 처단하고 난동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아랍 토후족들 중에서 가장 세력이 있었던 바니야스(Baniyas)족은 스스로 아랍 종족들을 통일하여 국왕에 취임하고 시리아 아랍 부족의 지휘관이었던 카르카스(Karkas)가 북부 아라비아를 다스리는 왕으로 재 선출되었으나 알 아인(Al-Ain) 지역으로 들어온 지 불과 한 달 후에 카르카스가 사망하면서 아라비아 반도의 정계는 바니야스족이 모두 지배하는 체제로 변화되었다. 바니야스족은 서남쪽으로 진격하여 아프리카 동부의 소말리아 정벌을 떠난 예멘 종족과 전쟁을 벌이려고 군사들을 모집하여 남예멘 사나(Sana) 로 진격해 들어갔다가 평소 바니야스 종족 위주의 전공과 전리품 재편에 의한 불만을 가진 쿠라이시 가문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무리하게 진압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쿠라이시 가문에 의해 바니야스 종족의 군사 대부분이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 때 바니야스 종족의 편에서 전리품을 양분하고 있었던 바레인과 카타르 지역에 살고 있던 카와심(Qawasim)족과 중부 야드리드 오아시스의 지배자인 팔라사(Falahsa)족이 페르시아 세력들을 격퇴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을 후회하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 왕인 샤푸르 2세(309~379)에게 다시 복속을 요청함으로 인하여 동부 아라비아해 유역을 다시 페르시아의 통치 하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카와심족은 팔라사족과 함께 페르시아군의 지원을 받아 예멘의 아덴(Aden)에 상륙한 다음 메카로 진군하였다. 당시 메카에 남아있던 쿠라이시 가문과 예멘의 소(小) 부족들은 메카로 들어오는 카와심, 팔라사, 페르시아 연합군을 막으려고 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홍해 연안을 중심으로 아랍 종족들과의 치열한 내전이 벌어진다. 이에 연합군은 제다(Jeda) 부족장의 아들인 쿠라이시 토로스(Quraish Toros)의 군과 전투를 벌였고 이들을 지잔(Jijan)에서 격파하고 메카로 진군했다. 그리고 메카의 관문 도시인 타이프(Tahif)에서 연합군을 막으려는 다수의 예멘 종족으로 구성된 시나(Shina) 연합군과 전투를 벌여 격퇴하고 메카에 입성한다. 


연합군의 메카 입성 과정에서 연합군의 우익을 수비했던 팔라사(Falahsa)족이 쿠라이시군을 격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카와심족과 더불어 아라비아 종족들 내부에서 팔라사 족의 정치적인 입지가 급상승하게 된다. 팔라사족은 후일 오만 이맘 왕국의 오만 세력들과 함께 카리지트 이맘 왕국의 일원이 된다. 이와 더불어 후일 아라비아 반도에서 거대 가문으로 등장하는 막투비스(Maktubis) 역시 연합군을 도와 쿠라이시의 잔당 중 한 종족인 메디아를 바하(Baha) 등지에서 격파하였다. 이렇게 메카에 입성한 연합군은 예멘과 쿠라이시의 잔당들을 소멸시키려고 하였고 그 중에는 쿠라이시 가문의 한 씨족인 하심(Hasim) 가문이 있었다. 하심 가문은 그의 외가인 베두인(Beduin)들의 강력한 변호로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랍 역사가 알 키부트 빈 나사르(Al-Qibut Bin Nasar)에 의하면 카와심족의 족장 벤쿠트(Benqut)는 하심 가문을 변호하는 자들에게 가문의 수장인 하심 알 무탈리브(Hasim Al-Mutalib)에서 쿠라시아 가문의 수장인 이븐 알 쿠라이쉬(Ibn Al-Quraish)의 모습이 보인다고 말하였고 이후 하심 무탈리브를 죽이지 못한 것을 매우 후회하였다고 한다. 


이후 메카와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카와심족에 대적할 부족이 없게 되었으며 카와심족은 대부분 세력을 잃은 바니야스족을 대신하여 사산 왕조 페르시아 샤푸르 2세로부터 360년경 아라비아 왕으로 선출되어 아라비아 반도 모든 종족의 군권과 상권, 행정권 모두를 장악했다. 아라비아 반도 내전으로 시작하여 카와심족의 집권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이후 아라비아 반도 전체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첫 번째는 아라비아의 부족장 중심의 정치에서 군대가 상당히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아라비아 부족들의 군대는 기본적으로 유목민들이 주축이 된 씨족 단위의 군 형태로 유지되었고 이들은 자신들의 부족보다는 씨족들을 위하여 전쟁을 벌이는 것을 의무로 받아들였고 이와 더불어 의무를 따르는 권리인 씨족 보호와 전리품 분리로 인한 이권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씨족 군대를 중심으로 한 전통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문명국의 제왕들에 맞서 씨족 유목민의 권리를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사산 왕조 페르시아 세력을 배경으로 한 카와심족의 군제 개혁으로 인하여 씨족 중심의 유목군이 페르시아와 마찬가지인 직업군으로 바뀌면서 군인들의 충성 대상은 전체 조직이라는 대의 대신 그들을 이끄는 카와심족의 족장이 되었다. 카와심족은 아라비아 반도 전체 부족의 전제 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그들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군제 개혁을 단행했고 벤쿠트(Benqut) 스스로도 자신의 카와심 씨족 병사들의 세력을 배경으로 전체적인 권력을 장악하려 들었다. 벤쿠트 역시 아라비아 내전에서 자신이 거느렸던 병사들의 세력으로 정적들인 쿠라이시 가문과 그의 추종 종족들을 격퇴했다는 점에서 군대가 이러한 정쟁에서 유력한 도구로 등장한 것이다. 이후 팔라사(Falahsa)족이나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내분 등을 이용하여 다시 세력을 회복한 쿠라이시 가문 역시 같은 방법으로 정권을 차지하고 유지하게 된다. 두 번째는 유목민들과 해안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무역상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치되면서 유목부족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들과 해상 무역상들을 주축으로 하는 세력으로 전체 아라비아 반도의 정치계 및 부족 계들이 양분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유목민들이라고 하여 이들이 유목 부족들 출신이거나 유목민의 이해를 진정으로 대변하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된다. 유목민 중심의 부족 구분은 그들의 출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 반도 내부 전체 부족들을 장악하기 위하여 해상 무역상들에 의한 정착 형태의 정치보다는 유목민들의 사막 부족 회의와 그들의 성급함, 쉽게 불만을 표출하는 민족적 성격의 폭력성을 최대한 이용하는 세력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이전의 바니야스족과 쿠라이시 가문의 정쟁역시 이러한 정책의 연장이었으며 이후 아라비아 역사의 주축으로 등장하는 마호메트와 쿠라이시 가문 출신의 우스만 씨족 역시 유목민파와 해상 무역상인 파로 분리되어 서로 경쟁하게 된다. 세 번째는 부족들 간의 정쟁이 격화되면서 정착 형으로 변환한 해상 무역 상인들끼리 정치권력을 분할해 가지는 이전의 방식으로부터의 합의 정치가 실종되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해상 무역 상인들이 부유한 재력들을 앞세워 주도하는 상인 연합 위주의 합의 정치는 해상으로 진출하기 전의 유목 부족장이 통제하던 방식들이 없어지고 토후 종족들이 권력을 나누어 통치한 제도가 출범한 이래 크게 바뀐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라비아 부족들이 해상으로의 팽창을 거듭하고 많은 노예와 황금, 그리고 돈을 주고 군사를 빌려오는 용병들이 넘치면서 이를 기반으로 다른 세력을 견제하는 정도를 넘어 상대보다 더 많은 권력을 차지하고 심지어 독점하려는 경향이 심해진다는 것이다. 해상 무역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과 군대, 또는 유목민들의 폭력성을 배경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권력자들의 독재적 성향이 심해지면서 반대로 이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는 부족 간 합의 정치의 상대적인 무능함이 부각된 것이다. 이후 합의가 아닌 독점을 위한 정쟁이 갈수록 격화되면서 굳이 페르시아의 내정간섭이 아니더라도 아라비아 부족 내의 내전이 심화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카와심족이 전체 아라비아 반도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을 때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보호 하에 정쟁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으나 이는 사실 페르시아를 배경으로 한 카와심족의 무자비한 숙청작업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기록들에 의하면 카와심 족은 자신들이 쿠라이시 부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페르시아에 대한 적대 행위를 하였다는 명목으로 거의 1만에 가까운 유목 씨족들과 해상 무역으로 부유한 재산을 획득했어도 페르시아 정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거상(巨商)들을 처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 사형당한 부족들 내부의 씨족들은 사병을 비롯하여 경제적으로 이득을 취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카와심족의 영향력은 무려 서기 6세기 후반까지 유지되었고 580년경에 카와심족이 제정한 유목민족에 대한 합의를 무효화시키려고 하던 중앙부 아라비아에 위치한 일부 베두인들은 유목민파의 편에 있으면서 카와심족이 탈취한 오아시스의 유목 지들을 원주 유목부족들에게 돌려주려고 하다가 카와심족이 끌어들인 페르시아군에게 패하고 중앙 아라비아 반도 내에서 초토화되었다. 이로써 해상 무역상 위주의 상업성 정치가 재현되었지만 이후 벤쿠트가 우려했던 부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페르시아 내전과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 등으로 인해 사산 왕조 페르시아 내부가 혼돈 상태에 놓이게 되면서 페르시아의 간섭이 줄어들자 쿠라이시 가문이 메카를 재건했고 카와심족의 영향력 또한 줄어들면서 아라비아 반도의 부족계는 다시 분열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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