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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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의 등장 이후, 아랍 전 지역은 무함마드가 창설한 종교인 신흥 이슬람교가 분열되어 있던 아라비아 반도 지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따라서 메카를 중심으로 부활한 쿠라이시 가문과의 영토 문제가 상당히 복잡한 편이다. 북쪽 홍해 연안에 위치한 메카와 제다가 페르시아의 내전과 쇠퇴를 이용해 세력을 회복한 쿠라이시 가문이 장악하고 있었다. 기존의 사막 대상을 이끌고 시리아나 이집트 등지로 원행에 주력했던 민족에서 홍해를 중심으로 한 해상 무역과 더불어 사막을 거쳐서 시리아 다마스쿠스와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까지 연결하는 대상 무역도 함께 겸업에 나섬에 따라 막대한 이윤을 끌어들였고 그 결과 쿠라이시 가문의 영향력이 회복된 것이다. 그리고 카와심 족이 베두인의 변호로 살려두었던 쿠라이시의 하심 가문에게서 무함마드가 나왔고 그는 신흥 이슬람교를 창안하였지만 기존의 카바 신을 숭배하던 쿠라이시 가문에 의해 메디나로 추방된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 자신의 추종 세력인 신흥 이슬람 세력을 이끌고 메카로 진격해 정복하고 쿠라이시 전 가문을 무슬림으로 개종시킨다.

오만 무스카트 성곽,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이로써 홍해 연안에 있던 서부 아라비아 반도가 모두 신흥 이슬람의 세력 하에 놓이게 되었고 무함마드는 본격적으로 아라비아 반도 전 지역에 대한 이슬람화를 노리게 되었다. 이후 무함마드는 예멘의 영토를 정복하여 무슬림으로 개종시켰고 이어 중앙부 아라비아 본토와 지리적으로 단절된 동부 아라비아 반도 해안 지역인 페르시아만의 바레인을 비롯한 월경지 영토를 넘보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군사 행동을 개시하여 중앙부 아라비아의 베두인들을 개종시켰다. 그리고 동부 아라비아 해안 바레인 섬까지 점령하고 오늘 날의 카타르 지역에 대한 공략을 앞두고 있었다. 이에 현재 아랍에미리트 내륙의 토후 족들은 오만 지역의 토후족들과 연합하여 무함마드에 저항하게 되었는데, 내부에 카와심족 통치에 불만을 가진 소규모 종족들이 무함마드와 내통하면서 오만 지역과 아랍에미리트 지역을 분리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무함마드의 다음 목표인 아랍에미리트 토후족과 카타르의 월경지를 고립시키고 오만 지역의 원(原) 종족들을 설득하여 모두 무슬림으로 개종시켰다. 오만에 대한 종교적 영향력에 성공한 무함마드는 마침내 무스카트에 입성했고 마지막으로 아랍에미리트 토후국에 대해 이슬람교 개종과 더불어 항복을 종용했다.
여러 아라비아 반도의 종족들처럼 아랍에미리트 지역도 고질적으로 물 부족이 심각한 곳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연 강수량이 100㎜가 채 안 될 정도로 적다 보니 식수를 대개 이웃 오아시스와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남부에서 수입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인근 오아시스들을 무함마드가 장악함에 따라 아랍에미리트에 속해있던 토후 족들 내부에도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이들 토후족들은 7개 정도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라스 알 카이마(Ras Al-Qaima) 토후족이 비교적 사막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물 부족이 다른 토후족들보다 심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물을 담보로 무함마드가 개종을 요구해오니 라스 알 카이마(Ras Al-Qaima) 토후 족은 다른 6개의 토후족들보다 상황이 심각하여 마침내 오래 견디지 못하고 무함마드에 복종과 개종을 약속했다. 마호메튼 라스 알 카이마(Ras Al-Qaima) 토후 족의 영토에 입성하면서 오아시스 지역의 물을 공급하게 해주니 다른 6개의 토후족들도 심하게 혼란을 겪게 되었다. 물론 아부다비와 두바이 지역에는 메소포타미아의 기술을 이용해 담수화 시설을 만들어 이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조금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샤르자(Sharja) 토후족이 물 부족과 더불어 물의 가격까지 인상되자 마침내 무함마드에게 굴복했다.
해안가에 위치한 나머지 5개 토후족들 중 푸자이라(Fujhaira)는 부족민의 인구 증가와 영토 외곽의 사막화로 인해 물 부족이 심각해졌고 담수화 시설도 두바이와 아부다비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오아시스의 물을 이용하기 위해 푸자이라도 무함마드에게 굴복했다. 629년 7월 움 알 쿠와인(Um Al-Quwain)이 이러한 위기를 탈출하기 위하여 무함마드를 기습했으나 니즈와(Nizwa)에서 패배하고 항복했다. 아즈만(Azhman)도 움 알 쿠와인(Um Al-Quwain)의 기습공격이 실패하자 무함마드에게 630년 항복함으로써 무함마드는 항복한 이들 5개의 토후족들을 묶어 새로운 이슬람 연합 토후 연맹으로 출범시켰다. 그러면서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고립시킬 속셈이었다. 이들 5개 토후족들은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장악하고 있던 카와심족에게서 탈퇴함으로써 같은 해 12월 2일, 무함마드의 이슬람 연합군으로써 두 도시를 공격하는 것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그 때까지 이슬람에 게 비협조적이었던 일부 페르시아 남부 지역도 무함마드와 이슬람교에 감화하여 개종함으로써 페르시아만을 중심으로 아부다비와 두바이는 고립된 상태가 되었다. 마침내 무함마드는 아부다비와 두바이의 연안 섬들을 점거함으로써 두 도시를 육지와 바다 양쪽으로 포위했다.
아부다비와 두바이는 해상 무역난을 견디지 못하고 다음 해인 631년 2월 10일에 무함마드에 항복했다. 아라비아 반도 내 이슬람교 출범 이전에는 각 아랍 부족들마다 각기 다른 종교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내 무함마드와 메카가 종교적으로 통합시켰고 아라비아 반도는 마침내 631년 무함마드와 신흥 이슬람으로 통일되었다. 아부다비와 두바이가 무함마드에게 항복한 2월 10일은 아라비아 반도 통일 기념일로 현재는 이 날에 한정되어 나온 기념우표가 발행되고 있다. 그로부터 1년 뒤 무함마드가 사망했고 이어 정통칼리프 시대가 개막된다. 정통 칼리프 시대 때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를 벗어나 오리엔트와 페르시아, 이집트 등의 전 방위적 원정을 감행한다. 그로 인하여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멸망했고 중동 오리엔트 전 지역이 이슬람 세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정통 칼리프 시대 이후, 이슬람 세계는 종교 내전의 내흥을 겪게 된다. 그에 더불어 카리지트파의 이맘 시칸데르(Shkahnder), 시칸데르의 아들, 사이드 빈 키쿠트(Said Bin Qykhut)가 동부 아라비아 해안에 세력을 확장시키면서 751년 무스카트를 중심으로 오만 이맘 왕국이 건국된다.
이로써 아랍에미리트의 토후족들은 오만 이맘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이맘 왕국의 지배하에 아랍에미리트 토후족들은 대상 무역이나 유목민으로써의 활동보다 해상 무역에 관심을 갖고 집중하게 되었다. 아랍에미리트 토후 족들이 다스리는 지역은 바이(Bay)로 이 때 개명이 되는데 이 지역 일대는 로마 시대부터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중세에는 케냐, 스리랑카, 베트남, 중국 등지로 향하는 상선들이 페르시아만 연안을 상당히 번잡하게 왕래했다고 한다. 오늘날 바이 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아랍 토후족들이 마침내 두바이와 바이 일대에 해상 무역의 토대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오만 이맘 왕국의 지배 시대인 서기 800년의 일이다. 9세기 무렵 오늘날의 아부다비와 두바이 지역은 바니야스족이 세력을 회복하여 전체 경제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두바이 북쪽은 살아남은 카와심족의 근거지로 남아 있었다. 한 때 같은 토후족으로 연합했던 두 부족 모두 해상 무역에 전념함에 따라 아라비아만의 해로를 장악하기 위해 부족 간 자주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833년 바니야스 족을 구성하고 있던 여러 소(小)부족 중 알 부 팔라사(Al-bu Falasa) 족 800여 명이 아부다비에서부터 분리 독립하여 두바이 쪽으로 이주했다.
이 때 이들을 이끌었던 가문이 막투비스(Maktubis) 가문으로 무려 1,000년 뒤에 나타난 아랍에미리트의 영웅인 셰이크 알 막툼 빈 부티(Sheik Al-Maktum Bin Buty)의 가문이었다. 이후 막투비스 가문은 셰이크(Sheik) 씨족이 지도하게 되었는데 셰이크 알 부켄트(Sheik Al-Bukent)가 두바이 지역의 지도자 지위를 승계했는데, 그는 부족들 간의 분쟁을 조율하여 두바이가 아라비아 반도의 중요한 항구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게 된다. 이러한 일들을 계기로 셰이크 알 부켄트(Sheik Al-Bukent)는 두바이 부족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토후족의 지도자로써 확실한 지위를 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富)는 오만 이맘 왕국에 바치는 세금으로 많은 이윤이 차출됨에 따라 무스카트 지역보다 그러한 이유로 발전이 늦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샤르자 토후족은 두바이와 아부다비 사이의 해안가 지역을 장악하고 두 지역으로 연결되는 항로에 대해 모든 선박에 대한 관세를 받기 시작했다. 샤르자 토후족은 이러한 두 거대 토후 족 도시에 대한 관세 계획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기 위해 아부다비와 두바이의 발전보다 비교적 늦은 1161년 오만 이맘 왕국의 술탄의 허가를 받아 관세 항구와 항만을 설립했다.
이들 샤르자 토후족들은 항구 이용에 대한 세금과, 이 지역을 통과하는 모든 국제 함선들에게 통과 세를 받는 등 세금으로 인한 발전 계획을 마련하고 이를 실천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1165년에는 상공회의소 격인 막사라이(Maksarai)라는 공관을 설립해 아부다비와 두바이 두 도시 사이 상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이를 관찰해 오만 왕실에 보고하도록 했다. 막사라이(Maksarai)는 무역이나 행정에 불필요한 규제를 철폐하는 등 상업적인 규제를 최소한으로 만들었다. 페르시아나 인도 지역의 함선들이 샤르자에서 휴식하고 갈 수 있도록 제도적인 개선을 해 나간 것으로 보여 진다. 샤르자 토후 족은 공정 거래에 관한 질서도 유지하게 했으며 최상의 무역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1203년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셀주크투르크와 이집트의 아유브 왕조를 지원하여 지속적인 전쟁 자금을 조달해 줌으로 인하여 기독교 세력과의 전쟁에서 밀리지 않게 하는 숨은 조력의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라스 알 카이마(Ras Al-Qaima) 토후 족은 아랍 토후 족들 중 가장 먼저 무함마드의 이슬람을 받아들인 종족으로 주로 내부 연안의 사막 대상 무역과 유목 경제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가축 털을 짠 천막 주거지에서 생활했고 각 씨족들은 광대한 사막에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물론 주민들의 일부는 오아시스의 야자 잎으로 만든 집에서 대가족 형태로 거주했다. 인구는 약 1만 명 정도였으며, 도시는 거의 갖추고 있지 않았다. 전체적인 면적으로 볼 때 1,684㎢로 아랍 토후족들 중에 4번째로 가장 컸다. 당시 무슬림으로 개종된 상태에서 오만의 이맘 왕국과 주로 교역했으며 오만 이맘 왕국에 일반 유목민들까지 무슬림으로 개종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라스 알 카이마(Ras Al-Qaima) 토후족의 주 교역 상대는 오만 이맘 왕국 산하의 유목민들이었고 이들이 사막에 도시를 세우고 국가적 면모를 갖추어 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의 일이다.